(동방문학 제86호 게재 특집2 심종숙 시인의 최신작 10편 독후감)
시를 읽으며 수신(修身)하다
김 재 황
(1)
심종숙 시인의 최신작 10편은 객관적으로 종교적이다. 그러나 내 개인적으로는 도덕적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원래 나는, 시라는 것을 ‘수신의 방편’으로 여기며 창작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 중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 사람도 더러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동방문학 제86호에 특집으로 실린 심종숙 시인의 작품을 일독한 결과, 나는 동양의 고전을 대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것도 다른 고전이 아니라, 수신의 의미가 가장 집약적으로 기술되어 있는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을 만나는 기쁨을 맛보았다.
원래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은 삼례(三禮) 중의 하나인 ‘예기’(禮記)라는 ‘예에 관련한 아주 큰 분량을 지닌 책’의 한 편들로 전해졌다. 이 또한 송나라 때의 학자인 주희(朱熹, 1130~1200)가 끄집어내어서 별도의 한 권으로 묶었다. 그리고 ‘논어’와 ‘맹자’와 함께 각각 주를 달아서 이른바 ‘사서집주’(四書集註)라는 책을 펴냈다. 이로써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의 사서(四書)가 자리 잡게 되었다.
정자(程子)의 말 중에 ‘대학공씨지유서이초학입덕지문야’(大學孔氏之遺書而初學入德之門也)라는 게 있다. 이는, ‘대학은 공씨의 유서로 초학이 덕으로 들어가는 문이다.’라는 뜻이다. 이를 근거로 ‘대학’은 ‘공자의 유서’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면 이 ‘중용’은 누가 지었을까?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기원전 87)의 사기 중 ‘공자세가’의 내용에 따르면, 이 ‘중용’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마천은 사기를 쓸 당시에 곡부로 가서 공자가 살던 곳을 살펴보았다. 그러니 아주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물론, 지금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중용’은 ‘자사’가 쓴 그대로의 내용은 아닐 성싶다. 왜냐하면 옛날 그 당시에는 모두가 책을 그대로 베껴 쓰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많은 첨삭이 생겨났을 게 분명하다. 결론적으로 ‘중용’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일관된 의도로 지은 역저라는 게 사계의 공통된 의견이라고 한다. 자사는 위대한 사상가이다. 그를 스승으로 삼고 출중한 ‘맹자’(孟子)가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다.
(2)
대학과 중용은 옛날은 물론이고 현재에도 선비라면 반드시 읽어야 될 문헌이다. 이를 바탕으로 몸을 닦아야 하고 반드시 이를 실천해야 한다. 그러면 심종숙 시인의 작품과 이 두 고전이 어디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지금부터 하나씩 살펴보고자 한다.
당신이 숨어 계실 때
모든 눈빛을 바라볼 수 없어
스스로 혼자가 됩니다.
당신이 숨어 계실 때
완전한 결핍을 느끼기에
갈망합니다.
당신이 숨어 계실 때
어둠 속에 버려지기 싫어
빛이신 당신을 찾아 떠납니다.
-작품 ‘당신이 숨어 계실 때’ 중
중용 제12장 부부지우장(夫婦之愚章) 23에 ‘군자지도 비이은’(君子之道 費而隱)이라는 글귀가 나온다. 이는, ‘군자, 즉 베풂이 높은 사람의 길은 빛나지만 숨어 있다.’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비’(費)는 일반적으로 ‘쓰다’ ‘소비하다’ ‘비용’ ‘용도’ 등의 의미로 쓰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빛나다’의 뜻으로도 쓰인다. 이는 ‘비’의 ‘빛남’과 ‘은’의 ‘숨어 있음’이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하튼 군자(베풂이 높은 사람)는 만나기가 참으로 어렵다. 언제나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외로움도 느끼게 되고 목마름도 가지게 되며 결국에는 기다리지 못하고 그를 찾아서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시에서의 ‘당신’이 ‘군자’를 가리킨다고 본다.
흰옷으로 갈아입은 너의 순수에
나를 던지고 싶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나의 영혼은
너를 목말라 한다.
이 물기 없이 메마른 땅에서
너에게 눈인사 건네고
부드럽게 감싸는 너의 품에서
나의 어둠이 희게 희게 풀린다.
-작품 ‘눈인사’ 중
대학장구(大學章句) 경문(經文)에 ‘대학지도 명명덕’(大學之道 明明德)이라는 글귀가 있다. 이는, ‘큰 배움의 길은 밝은 베풂을 밝히는 데 있다.’라는 뜻이다. 고전에서 ‘덕’을 ‘얻음’이라고 풀이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덕’을 ‘베풂’이라고 풀이한다. 이러한 풀이는 고전에서 ‘인’(人)을 ‘사람’이 아니라 ‘내가 아닌 남’이라고 풀이하는 바와 같다. 주자, 즉 주희(朱熹)는 ‘대학자 대인지학야’(大學者 大人之學也)라고 했다. 즉, <‘큰 배움’이란 것은 ‘커다란 마음을 지닌 사람의 배움’이다.>라는 뜻이다. 그건 그렇고, ‘명명덕’(明明德)을 본다. 명덕, 즉 ‘밝은 베풂’을 밝힘은 어떤 것일까? 그건 그리 어렵지 않다. 이웃에게 ‘눈인사’를 보내는 것이다. 시에서의 ‘눈인사’가 바로 ‘명덕’이다. 그러면 어둠이 ‘희게 그리고 또 희게’ 풀린다. 왜냐하면 ‘밝은 베풂’을 다시 한 번 더 ‘밝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에서 ‘눈인사가 눈부시다.’라고 끝을 맺고 있다.
수유리에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말자
은행나무 가로수길 아래 걸으며
발밑에서 탁탁 은행 터지는 소리와
그 냄새를 맡으며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기에 한없이 낮아질 수 있고
낮아졌기에 모두 감사로운 이 시간을 위해
수유리에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말자고
-작품 ‘수유리에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말자’ 중
중용 제30장 중니조술장(仲尼祖述章)에는 ‘비여천지지무불지개 무불부도’(辟如天地之無不持載 無不覆幬)라는 글귀가 있다. 이는, <견주자면 ‘하늘과 땅’이 실어 주지 않음이 없고 다시 덮어 주지 않음이 없는 바와 같다.>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비’(辟)는 원래 ‘임금 벽’이나 ‘피할 피’ 자로 쓰이는 글자이다. 여기에서는 ‘비’(比)와 같은 뜻으로 쓰였다고 본다. 시에서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기에 낮아질 수 있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그리고 ‘낮아졌기에 감사하다’는 말은 또 무슨 뜻인가? 우리를 갖게 하고 살 수 있게 하는 것은 모두가 ‘하늘과 땅’의 베풂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땅이 실어 주고 하늘이 덮어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갖는다고 하는 것은, 모두가 하늘과 땅의 것을 잠시 빌리는 것이다. 그러니 ‘한없이 낮아질’ 수밖에 없고 ‘낮아졌기에 감사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 세상에 빈손으로 오지 않았는가? 내 귀에는 ‘수유리’가 ‘이 세상’이라는 뜻으로 자꾸 들린다.
하늘에는 오래도록 별등을 켜서
북두칠성 낮게 비추는데
잰걸음으로 가는 이 길
두 개의 녹빛 신호등을 건너면
성당 앞마당에 서 계시는 성 요셉
이 시간에 자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에도
이 시간에 임종하는 이들의 숨소리에도
이 시간에 일터로 향하는 이들의 발걸음에도
함께 하소서 성 요셉이여
-작품 ‘새벽 미사’ 중
대학장구(大學章句) 전(傳)2에 ‘탕지반명왈 구일신 일일신 우일신’(湯之盤銘曰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이라는 글귀가 나온다. 이는, <탕(임금)이 ‘세숫대야에 새겨 놓은 글’로 일컫는다. “다만 하루를 새롭게 하고 날마다 하루를 새롭게 하며 다시 더 하루를 새롭게 한다.”>라는 뜻이다. ‘반명’(盤銘)은 ‘대야(盤, 세숫대야)에 새겨 놓은 글(銘)’을 이른다. 즉, 상(商)나라 탕(湯) 임금의 매일 세숫물을 담는 그릇에 ‘이전에 묻은 때를 씻어버리고 진실로 자신을 새롭게 하는 데에 단 하루를 노력으로 성공한다면 다음에는 그것을 실마리로 삼아서 하루하루를 끊임없이 새롭게 하여 간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시의 제목이 ‘새벽 미사’이다. ‘미사’란 어떠한 일인가. 신앙적인 ‘세수’가 아니겠는가? 모름지기 하루하루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새벽에 세수를 해야 한다. 게다가 ‘미사’가 내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자고 있는 아이들과 임종하는 이들과 일터로 향하는 이들까지의 일이듯, ‘세숫대야’에 씌어 있는 글 또한 그것을 보는 모든 사람들의 일이 아니겠는가?
새들의 둥지는 높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생나무 가지 사이에
수많은 죽은 잔가지들을 얼키설키 물어다
삶과 죽음의 가볍고 둥근 집을 지었다
저런 작품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태양은 말없이 떠서 동에서 서로 기울어도
바람에도 기울지 않는 견고한 새들의 집
부러지지 않는 생나무와
죽은 잔가지들이 이룬 조합의 비밀을 숨긴다
나도 저런 집 한 채를 갖고 싶다.
-작품 ‘새들은 왜 공중에다 집을 지을까- 까치집’ 중
대학장구(大學章句 전(傳)3에 ‘시운 민(면)만황조 지우구우.’ 자왈 ‘어지 지기소지 가이인이불여조호.’(詩云 ‘緡(緜)蠻黃鳥 止于丘隅.’ 子曰 ‘於止 知其所止 可以人而不如鳥乎.’) 이는, <시는 이른다. “노래하는 저 꾀꼬리는 ‘언덕의 한쪽이 높고 뾰족하게 솟은, 나무가 우거지고 구석진 곳’에 머물고 있네.” 공자가 말한다. “머무름에 있어서 (새도) 머무를 곳을 아는데, 사람이면서 새만도 못해서야 되겠는가.‘>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가리키는 시는, 시경 ‘소아’(小雅)의 어조지십(魚藻之什) 중 ‘면만편’(緜蠻篇)에 들어 있는 구절이다. 그런데 ‘대학’에서와는 달리, ‘緡蠻黃鳥’(민만황조)가 아니라 ‘緜蠻黃鳥’(면만황조)로 되어 있기도 하다. ‘緡’과 ‘緜’은 같은 뜻이라고 한다.
대학장구에서는 ‘꾀꼬리’가 머물고 있는데, 시에서는 소제목이 ‘까치집’이라고 되어 있다. ‘까치집’이면 어떠하고 ‘꾀꼬리의 집’이면 어떠한가. ‘머무는 곳’이 ‘집’이고 ‘둥지’라고 본다. 그리고 시에서 ‘나도 저런 집 한 채를 갖고 싶다.’라고 부러워했는데, 공자님은 “새도 머무를 곳을 아는데 사람이면서 새만도 못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신다. 참으로 할 말이 없다.
그런 나에게
저 세상은 멀다
나는 고백하고 싶다
저 세상 영혼들이 있다고 믿지 않았음을
나의 아둔과 고집이
그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나는 고백해야만 한다
저들을 느끼기 위해
찬 겨울바람이 나를 꾸짖는다
찬 겨울바람이 나를 소리 울게 한다
찬 겨울바람이 차디찬 내 마음을 뜨겁게 한다
나는 소리 없이 운다
죽은 모든 영혼들과 화해하면서
떨며 뜨겁게 운다
찬 겨울바람의 회초리가
나를 뜨겁게 울게 한다.
작품 ‘찬 바람 속에서-장지에서’ 중
중용 제25장 성자자성장(誠者自成章)에는 ‘성자자성야 이도자도야’(誠者自成也 而道自道也)라는 글귀가 있다. 이는, <‘참된 마음’이라는 것은 ‘스스로 이룸’이고, 따라서 길은 ‘스스로 열림’이다.>라는 뜻이다. ‘자성’(自成)과 ‘자도’(自道), ‘스스로 이루고 스스로 열린다(다닌다).’라는 뜻일 것 같다. 그 연장선 위에 ‘자연’(自然)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자연’을 ‘스스로 그러하다’라고 풀이한다.
그런 의미에서 ‘참된 마음’을 지녀야만 ‘믿음’도 있을 수 있고 고백도 있을 수 있으며 자책도 있을 수 있다. 찬 겨울바람은 ‘스스로 그러하다.’ ‘스스로 그러함’이 나를 뜨겁게 울게 한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삶과 죽음까지 모두 그러하다. ‘참된 마음’은 어떻게 해야 지닐 수 있는가? ‘참된 마음’은 스스로 이루어진다. 그런 다음에야 ‘길이 스스로’ 열린다. 시에서 겨울바람이 스스로 고백하도록 만들고 스스로 울게 만든다. 스스로 그러하니 ‘참된 마음’이다. ‘참된 마음’이니 죽은 모든 영혼들과 화해하고 그리워한다. 그래서 길은 스스로 열린다.
먼 길을 가는 자매여
이 겨울은 당신에게 외롭지 않을 것이며
이 겨울은 당신의 영결을 위해
하얀 눈을 뿌릴 것이며
그것들은 흰 새떼나
신부의 면사포 되어
당신 품에 안길 겁니다.
당신이 지상에 산 날수만큼
기다리고 기다렸던
신랑의 손을 잡고
오늘은
천국에 이르는 레드 카펫을 밟고
어떤 신부보다 눈부시게 걸어갈 겁니다.
-작품 ‘박 루시아님을 보내 드리고’ 중
중용 제16장 귀신장(鬼神章)에 ‘사천하지인재명성복 이승제사. 양양호! 여재기상 여재기좌우.’(使天下之人齋明盛服 以承祭祀. 洋洋乎! 如在其上 如在其左右.)라는 글귀가 있다. 이는, ‘하늘 아래 사람으로 하여금 삼가고 밝게 하며 옷을 딱딱하고 바르게 하여 죽은 사람의 넋에게 먹을 것을 바치도록 한다. 끝없이 넓구나! 저 위에 있는 것 같고 그 오른쪽과 왼쪽에도 있는 것 같다.’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재’(齋)는 ‘재계하다’라고 풀이한다. ‘재계’(齋戒)는 ‘부정(不淨)한 일을 멀리하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함’을 이른다. 그리고 ‘성복’(盛服)은 ‘잘 차려 입은 옷’을 나타낸다. 그런가 하면, ‘성’(盛)은 ‘성하다’ ‘넘치다’ ‘엄정하게 하다’ ‘칭찬하다’ 등의 뜻도 지닌다.
물론, 지금도 죽은 이를 떠나보낼 때에는 옷을 단정하게 입는다. 그게 예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재명성복’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이승제사’는 그 격식에 차이가 있다. 시에서는 ‘외롭지 않기를’ ‘하얀 눈을 뿌릴 것을’ ‘당신 품에 안길 것을’ 바친다. 그리고 ‘천국에 이를 것을’ ‘어떤 신부보다 멋지게 걸어갈 것을’ 축원한다. 이게 모두 제사이다.
그 작은 몸이
나의 어둠을 몰아내시고
한 자루 초가 되셔서
고요히 타고 계셨다.
나의 더러움도
나의 허영도
나의 욕망도
나의 상처도 타버리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오신 그 분의 빛이
이 모든 걸 이루셨다
가장 조그맣고
여리며
벌거숭이로
온 아기 예수가.
-작품 ‘2017년도 성탄’ 중
중용 제31장 총명예지장(聰明睿知章)에 ‘부박연천 이시출지’(溥博淵泉 而時出之)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크고 넓으며 깊고 넘쳐흘러서 때에 맞게 나타난다.’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부박’(溥博)은 넓이(breadth)이고, ‘연천’(淵泉)은 깊이(depth). 그리고 ‘시출’(時出)에서 ‘시’는, ‘때때로’(occasionally)가 아니라, ‘때에 맞추어(timely)이다.
시에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 오셔서 몸을 누이신 즐거운 날, 나의 어둠을 몰아내셨다.>라고 노래한다. 그 어둠은 ‘쓸쓸한 마음’ ‘병든 육신’ ‘불합격한 아들’ 등의 일이다. 아기 예수뿐만이 아니다. 모든 목숨이 때에 맞게 태어나고 때에 맞추어서 죽는다. 그게 세상의 이치이며 어느 누구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기 예수가 한여름이 아닌 ‘흰 눈이 내리는 그때’에 태어나신 까닭이 있을 터이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 ‘크고 넓으며 깊고 넘쳐흘렀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러하리라. 우리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고 넓으며 깊고 넘쳐흘러서 그분께서 그렇게 오셨으리라. 그걸 알게 되면, 마음의 어둠이 어찌 사라지지 않겠는가. 높게 쓰시려고 연단을 주신다는 걸 믿어야 한다.
지난 시간의 앙금을 말없이 쓸어내리는 빗발이
마음의 어둔 구렁을 메우고
거기에 환한 꽃길을 냅니다.
당신을 살리는
나를 살리는
그 길로 비는 말없이 손짓하며 부릅니다.
-작품 ‘봄과 비’ 중
중용 제28장 오종주장 (吾從周章)에 ‘수유기위 구무기덕 불감작예악언’(雖有其位 苟無其德 不敢作禮樂焉)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비록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더라도 적어도 두루 미치는 베풂이 아니고서는 감히 ‘지켜야 할 마음가짐’과 ‘멋스럽게 노는 일’을 드러낼 수 없다.>라는 뜻이다.
시에 있어서 처음에 ‘나는 당신에 비가 되어 갑니다.’라고 했다. 그러하니 ‘나’는 ‘비’이고 ‘당신’은 ‘봄’인 것 같다. 그리고 둘째 연에서 ‘머리에는 작은 꽃을 피우겠습니다.’라고도 했다. 내가 비가 되어 내림으로써 봄의 머리에 작은 꽃을 피우겠다는 뜻일 것 같다. 어쨌든 ‘봄’에게 있어서 ‘비’는 가장 윗자리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봄에 내리는 비’는 두루 미치는 베풂을 지니지 아니하면 안 된다. 다시 말하면 봄비답게 내려야 한다. 그 베풂이 두루 미치지 못하고 한쪽으로 기울게 되면 ‘지켜야 할 마음가짐’과 ‘멋스럽게 노는 일’을 드러낼 수 없다.
두루 베푸는 빗발이어야 마음의 어둔 구렁을 메우고 환한 꽃길을 내게 된다. 그것이 봄을 살리고 비를 살리는 길이기도 하다.
큰어머니는 베틀에 앉아
온종일 시름의 베를 짜고 있었다
정오의 아지랑이 사이를 흔들고
찰칵찰칵 바디를 내리는 소리
봄의 고요 속에서
큰어머니는 마음의 반역들을
직각으로 내려서 씨실에 묶는다.
-작품 ‘큰어머니의 베틀’ 중
중용 제26장 지성무식장(至誠無息章)에 ‘지성무식. 불식즉구 구즉징 징즉유원 유원즉박후 박후즉고명(至誠無息. 不息則久 久則徵 徵則悠遠 悠遠則博厚 博厚則高明)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두루 미치는 ’참된 마음‘은 쉼이 없다. 쉼이 없으니 오래 가고, 오래 가니 ‘어떤 일이 나타날 낌새’가 보이고, ‘어떤 일이 나타날 낌새’가 보이니 아득히 멀고, 아득히 머니 넓고 두터우며, 넓고 두터우니 높고 밝다.>라는 뜻이다.
‘참된 마음’을 지니고 베를 짜야 한다. 그 방편이 ‘베틀’이다. 큰어머니는 온종일 베를 짠다. 그야말로 쉼이 없다. 오래 가니 낌새가 보인다. ‘흔드는 정오의 아지랑이’ ‘찰칵찰칵 바디를 내리는 소리’ ‘봄의 고요’ 등이 낌새이다. 봄의 계절이니 작약이 핀 뜰로 벌나비가 날아든다. 이런 낌새들은 아득히 멀고, 아득히 머니 넓고 두터운 ‘눈물 모르는 베 하 필’이 태어난다. 이 베는 넓고 두텁기 때문에 높고 밝다. 참된 마음으로 베를 짜는 모습은 어찌 숭고하지 않겠는가. 무엇인가 열중하는 모습은 마치 한 송이의 꽃을 보는 것 같다.
(3)
시는 쉬워야 한다. 그게 내 생각이다. 어렵게 쓰는 시는 권위주의적인 발상이라고 본다. 그게 어디 시에만 있는 것인가? 과거에는 법률도 어려워서 이해하기가 힘들고 의사들의 기록도 모두 어려운 단어들을 기술했다. 이런 것들이 모두 권위적인 발상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법률도 쉽게 고치고, 의사들도 알아볼 수 있도록 기록하고 있다. 다만, 아직도 문학에서는 어려운 내용을 기술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일수록 시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또 하나. 시는 참되게 써야 한다. 참다움이 없다면 그따위 시를 읽어서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스트레스만 쌓일 뿐이다.
중용 제11장 색은행괴장(索隱行怪章)에 <자왈 “색은행괴 후세유술언 오불위지의.”(子曰 索隱行怪 後世有述焉 吾弗爲之矣)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선생(공자)이 말했다. “숨어 잇는 것을 들쑤셔 내고 이상야릇하게 굴면 죽은 다음에 이야깃거리가 될 만큼 알려질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러하게) 하지 않겠다.”라는 뜻이다. ‘색은행괴’에 ‘남이 알 수 없도록 어렵게 쓰는 글’도 포함된다고 하겠다.
모두 읽어 보면 알겠지만, 심종숙 시인의 시는 쉽다. 그러면서도 가슴에 잔잔한 물결을 일도록 만든다. ‘참된 마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터이다. 머리맡에 두고 외로울 적마다 펼쳐서 읽을 수 있는 시로, 심종숙 시인의 이 시들을 추천하고 싶다.
'감상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승 공자께 시를 다시 여쭙다/ 김 재 황 (0) | 2019.03.01 |
---|---|
이시환 시인 신작세계 '자유서정시' 5편에 대한 감상문 '장자, 그 가슴에 닿다' (0) | 2018.10.08 |
이시환 시집 ‘솔잎 끝에 매달린 빗방울 불 밝히다’ 독후감<시 숲에서 만난 노자> (0) | 2018.03.05 |
북한 예술단 공연을 시청하고 (0) | 2018.02.10 |
불경탐구 '썩은 지식의 부자와 작은 실천'을 읽고 (0) | 2018.0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