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환 시집 ‘솔잎 끝에 매달린 빗방울 불 밝히다’
독후감 ‘시 숲에서 만난 노자’
김 재 황
시인이라면 쉬지 않고 시를 지어야 한다. 왜냐하면, 시를 짓는 일이야말로 시인이 ‘수신(修身)을 행하는 방편(方便 upāya)’이기 때문이다. 이를 다른 말로 쉽게 설명하면, 선비(시인)라면 끊임없이 ‘어짊’(仁)에 들어야 하는데 그 어짊에 드는 경우가 바로 시를 짓는 그 때이기 때문이다. 논어(論語)에는 다음과 같은 공자님 말씀이 나온다. ‘회야 기심 삼월불위인 기여즉일월지언이이의(回也 其心 三月不違仁 其餘則日月至焉而已矣).’ 이는, ‘안회는 그 마음이 석 달을 지나도 어짊에 어긋나지 않았는데, 그 나머지(그 외의 제자들)는 하루에 한 번이나 한 달에 한 번을 어짊에 이르고 말더라.’라는 뜻이다. 이 어짊을 잃지 않아야 맑고 깨끗한 인생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음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시환 시인은 올바른 시인의 길을 걸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이 자리를 빌어서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나는 모임의 자리에서 받은 이시환 사백의 시집 ‘솔잎 끝에 매달린 빗방울 불 밝히다’를 소중히 간직하고 와서 조용한 시간을 택하여 가슴을 여미고 작품 한 편 한 편을 음미하며 일독하였다. 그리고 무릎을 쳤다. 그 안에 노자가 살아 있었다. 그리고 나를 보고는 빙긋 웃으며 말을 건네었다. 이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닌가!
울긋불긋 다홍치마를 두른
너의 치맛자락 속으로 기어들어가
숨소리조차 납작하게 짓눌러 놓았건만
가슴 두근거리는 바람에
끝내는 들통 나고 말았네.
-작품 ‘적상산에서’ 중에서
노자 제6장 중 일부를 본다. ‘곡신불사 시위현빈. 현빈지문 시위천지근(谷神不死 是謂玄牝. 玄牝之門 是謂天地根).’ 이는, <골짜기의 ‘베풂이 아주 높은 검님’은 죽지 않으니 이를 ‘거무레한 암컷’이라고 일컫는다. ‘거무레한 암컷’의 드나드는 문을 가리켜서 다른 말로는 ‘하늘과 땅의 뿌리’라고 일컫는다.>라는 뜻이다. ‘곡신불사’(谷神不死)에서 ‘곡신’이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곡신’은 ‘산골짜기의 가운데에 아무것도 없는, 즉 무(無)의 골짜기인 낮고 고요하며 빈 곳의 신령스러운 존재’라고 한다. 이는, 왕필(王弼)의 풀이이다. 그러나 나는 이를 ‘산골짜기의 베풂이 아주 높은 검님’이라고 풀었다. 그런데 이 ‘산골짜기의 검님’이란, 바로 ‘여성의 성기’를 뜻하는 성싶다. 여기에서 생명이 태어나니 이보다 더 신령스러움이 어디에 또 있단 말인가. 그래서 ‘현빈’(玄牝), 즉 ‘거무스레한 암컷’이라는 말이 썩 잘 어울린다. 참으로 신비한 ‘모성’(母性)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시환 사백은 이 시에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끝내는 들통 나고 말았네.’라고 자탄까지 한다.
이제, 그만들하거라!
간지럽다, 이 녀석들아,
이 순간만은 나도 너희들처럼
한 마리 산중의 물고기이외다.
-작품 ‘간지럼’ 중에서
노자 제49장 중 일부를 본다. ‘성인재천하흠흠 위천하혼기심 백성개주기이목 성인개해지(聖人在天下歙歙 爲天下渾其心 百姓皆注其耳目 聖人皆孩之).’ 이는, <‘거룩한 이’는 하늘 아래 있는데 움츠리고 움츠려서 하늘 아래를 잘 되게 하려고 그 마음을 섞이게 한다. 모든 사람이 함께 그 귀를 기울이고 그 눈을 모으지만, ‘거룩한 이’는 모두 아이로 마주한다.>라는 뜻이다. ‘개해지’(皆孩之)는 ‘모두 갓난아이와 같은 상태에 놓아줌’이라고 한다. ‘해’는 ‘갓난아이’ 또는 ‘어린아이’이고 ‘해지’는 ‘어린아이로 마주한다.’이다. 다시 말해서 ‘어린아이처럼 대우한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해지’를 ‘어린아이로 만들다.’라고도 풀이한다. 나는 이를 ‘어린아이로 마주한다.’라고 본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지니지 아니하고는 물고기와 대화할 수 없다. 이미 이시환 사백은 ‘하늘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산중의 물고기’로 자처한다.
그것도 몸집이 집채만하고
힘도 세어 보이는 코끼리가
놀랍게도 일곱 빛깔 연꽃 위로
성큼성큼 걸어온다.
-작품 ‘좌선2’ 중에서
노자 제35장 일부를 본다. ‘집대상 천하왕. 왕이불해 안평태(執大象 天下往. 往而不害 安平太).’이는, <큰 생김새를 잡고 하늘 아래로 간다. 가도 ‘깎이게 되지’ 않으며, ‘거북하거나 괴롭지 아니하고 아무 일이 없으며 걱정도 없어서’ 크다.>라는 뜻이다. ‘집대상’(執大象)에서 ‘대상’은 ‘대도’(大道), 즉 ‘큰 길’을 가리킨다고 한다. 왕필(王弼)은, ‘대상은 천상(天象)의 어머니로서 차지도 따뜻하지도 서늘하지도 않은 까닭에 능히 만물을 포섭하고 통괄하여 범상(犯傷)하는 일이 없다.’라고 하였다. 즉, ‘대상’은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형상의 모체인,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길(道)의 형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상’을 글자 그대로 풀어서 ‘생김새’라고 하였다. 그리고 ‘안평태’(安平太)에서, 어느 기록은 ‘태’(太)를 ‘태’(泰)로 기술하기도 했다. 모두 같이 ‘크다’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안’과 ‘평’과 ‘태’는 모두 ‘평안하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게 점진적인 뜻을 지닌다고 한다. 혼란스럽다. 나는 글자가 틀린 만큼 풀이도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안’은 ‘거북하거나 괴롭지 아니하다.’라고 했으며, ‘평’은 ‘아무 일도 없고 걱정도 없다.’라고 했다, 그리고 ‘태’는 그대로 ‘크다’라고 풀었다. 그런데 이시환 사백은 이를 ‘하얀 코끼리 한 마리’라고 했다. 기막힌 형상화이다.
세상 속에 살면서
늘 세상 밖을 꿈꾸었네.
한 때는 의욕이 넘쳐
물 밖으로 뛰쳐나온 물고기처럼 파닥거렸지만
-작품 ‘자화상2’ 중에서
노자 제47장 일부를 본다. ‘불출호 지천하 불규유 견천도 기출미원 기지미소(不出戶 知天下 不窺牖 見天道 其出彌遠 其知彌少).’이는, <지게문을 나가지 않고도 하늘 아래를 알고, 들창을 엿보지 않고도 하늘 길이 보인다. 그 나감이 더욱 멀면 그 앎은 더욱 적다.>라는 뜻이다. ‘불출호’(不出戶)는 일반적으로 ‘문밖을 나가지 않음’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호’는 ‘지게문’ ‘외짝문’ ‘출입구’ 등의 여러 뜻을 지닌다. 나는 그 중에서 ‘지게문’을 골랐다. ‘지게문’은 ‘마루에서 방으로 드나드는 곳에 안팎을 두꺼운 종이로 바른 외짝의 문’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리고 ‘불규유’(不窺牖)에서 ‘규’는 ‘엿보다’ ‘보다’ 등의 뜻을 지니고 ‘유’는 ‘들창’ ‘격자창’ 등의 뜻이 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불규유’를 ‘창문 밖을 엿보지 않는다.’라고 풀이한다. 나도 이 뜻을 따라서 ‘들창을 엿보지 않는다.’라고 했다. 또, ‘견천도’(見天道)에서 ‘견’은 ‘보다’ ‘보이다’ 등의 뜻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앞의 ‘들창을 엿보지 않는다.’에 따라 ‘보이다’로 해야 가장 적당할 성싶다. 다시 말해서 ‘견천도’는, ‘하늘 길을 본다.’라는 말이 아니라, ‘하늘 길이 보인다.’라고 해야 옳을 듯싶다. 그런가 하면, ‘기출미원’(其出彌遠)이나 ‘기지미소’(其知彌少)에서 ‘미’는 ‘더욱’ ‘깁다’ ‘그치다’ 등의 여러 뜻을 지니고 있다. 나는 그 중에서 ‘더욱’을 택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미원’은 ‘점점 멀어짐’으로 풀이하고 있으며, ‘미소’는 ‘점점 적어짐’으로 풀이하고 있다. 많이 읽으면 혜안(慧眼)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이시환 사백은 ‘문 밖’이 아니라 ‘물 밖’이다. 금상첨화이다.
꽃이 지기로소니
아쉬워할 것도 없고
꽃이 지기로소니
서러워할 것도 없네
피었으면 지고 져야 만이
비로소 열매를 맺나니
-작품 ‘낙화기’ 중에서
노자 제22장 일부를 본다. ‘곡즉전 왕즉직. 와즉영 폐즉신. 소즉득 다즉혹(曲則全 枉則直. 窪則盈 敝則新. 少則得 多則惑).’ 이는, <휘어지면 고스란하게 되고 구부리면 바르게 된다. 우묵하면 고이게 되고 깨지면 새롭게 된다. 적으면 얻게 되고 많으면 빠지게 된다.>라는 뜻이다. ‘곡즉전’(曲則全)에서 ‘곡’은 ‘굽다’ ‘휨’ ‘굽히다’ ‘자세하다’ ‘간절하다’ ‘옳지 않다’ ‘자질구레하다’ 등의 여러 뜻을 지닌다. 나는 그 중에서 ‘휨’을 고른 후에 ‘휘어지다’라고 했다. 그리고 ‘전’은 ‘온전하다’ 또는 ‘온전히 하다’ 등의 뜻을 택하여 ‘고스란하다’라고 했다. 또, ‘왕즉직’(枉則直)에서 ‘왕’은 일반적으로 ‘굽히다’의 뜻을 쓰고 있기에, 나는 ‘구부리다’로 했다. 그리고 ‘직’은 ‘곧다’ ‘바른 길’ ‘바른 행실’ ‘바르다’ ‘맞다’ ‘시중들다’ ‘다만’ ‘곧’ ‘즉시’ ‘일부러’ 등의 뜻을 지닌다. 그러나 나는 그 중에서 ‘바르다’를 택했다. 그리고 ‘폐즉신’(敝則新)에서 ‘폐’는 ‘해지다’ ‘떨어짐’ ‘깨지다’ ‘부서짐’ ‘피폐하다’ ‘지치다’ ‘버리다’ 등의 여러 뜻이 있다. 나는 그 중에서 ‘깨지다’를 골랐다. 일반적으로 ‘폐’는 ‘해지다’나 ‘낡다’ 등으로 풀이되고 있다. 그런데 놀랍다. 이시환 사백의 시에서는 ‘꽃이 져야 열매를 맺음’을 이야기한다. 이는 ‘폐즉신’, 즉 ‘깨지면 새롭게 된다.’를 가리킨다.
오늘 아침, 살갗을 스치는 바람결은 차갑고
하늘은 유달리 맑고 높고 푸르러 흰 구름 깨끗하고
멀리 있는 산조차 선명한 게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딴 세상이 되었네 그려.
-작품 ‘가을손님’ 중에서
노자 제43장 일부를 본다. ‘천하지지유 치빙천하지지견 무유입무간(天下之至柔 馳騁天下之至堅 無有入無間).’ 이는, <하늘 아래 아주 부드러운 것이 하늘 아래 아주 단단한 것에 말을 타고 달려들 듯 한다. 있을 게 없음은, 틈이 없는 곳으로 들어간다.>라는 뜻이다. ‘천하지지유’(天下之至柔)에서 ‘지유’는 ‘지극히 부드러운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는, ‘물’을 가리킨다고 한다. 나는 이를 그저 ‘아주 부드럽다’라고 풀었다. 또, ‘치빙천하지지견’(馳騁天下之至堅)에서 ‘치빙’은 ‘말을 달림’이나 ‘돌진함’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말을 타고 달려들 듯 한다.’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마음대로 달리면서 부림’이라는 풀이도 있다. ‘지견’은 ‘지극히 단단한 것’인데, ‘바위’나 ‘돌’ 따위를 가리킨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무유’(無有)는, ‘있는 것이 없음’이나 ‘비(虛)고 없는 것’이나 ‘눈으로 보아서 형체가 없음’이나 ‘무형의 힘’ 등의 풀이들이 있다. 그러나 나는 ‘있어야 될 것이 없음’으로 보았고, 그래서 ‘있을 게 없음’이라고 풀었다. 그리고 ‘입무간’(入無間)에서 ‘무간’은 ‘빈틈없는 곳’이다. 그래서 ‘입무간’은 ‘틈이 없는 데까지 들어감’의 의미가 된다. 아무튼 이시환 사백의 시에 등장하는 ‘바람’이라든가 ‘하늘’이라든가 ‘구름’ 등이 ‘유’(柔)의 범주에 든다고 본다. 이들의 부드러움이 스며들면 ‘딴 세상’이 될 수밖에 없다.
내가 낮잠을 자면서,
귀에 익은 새소리를 듣는 것도
문틈을 빠져나가는 바람의 말씀을 듣는 것도
그 그릇 속의 그릇 안에서 일어나는
작은 소용돌이의 파문일 따름이네.
-작품 ‘파문’ 중에서
노자 제4장 일부를 본다. ‘도충 이용지 혹불영 연혜 사만물지종. 좌기예 해기분 화기광 동기진 담혜(道冲 而用之 或不盈 淵兮 似萬物之宗.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湛兮).’이는, <길은 빈 그릇이다. 다시 말하자면, 쓸 수 있고 늘 차지 않는다. 깊고 멀어서 모든 것의 으뜸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 그 날카로움을 꺾고 그 엉클어짐을 풀며 그 빛을 부드럽게 하여 그 티끌과 함께 하니 그 맑음이 늘 있는 것 같다.>라는 뜻이다. ‘도충’(道冲)에서 ‘충’은 ‘충’(沖)의 속자이다. ‘충’은 ‘비다’ ‘사이’ ‘이르다’ ‘빈 그릇’ 등을 나타낸다. 나는 ‘빈 그릇’을 골랐다. 그리고 ‘혹불영’(或不盈)에서 ‘혹’은 ‘상’(常)과 같아서 ‘언제나’ ‘늘’ ‘항상’ 등으로 풀이된다. 또, ‘연혜’(淵兮)에서 ‘혜’는 어조사이고, ‘연’은 심원(深遠), 즉 ‘깊고 멀어서’를 가리킨다. 그리고 ‘사만물지종’(似萬物之宗)에서 ‘종’은, ‘으뜸’ ‘근본’ ‘우두머리’ 등을 뜻한다. 나는 그 중에서 ‘으뜸’을 택했다. ‘해기분’(解其紛)에서 ‘분’은 ‘문란한 것’이나 ‘뒤헝클어진 것’ 등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저 ‘엉클어짐’이라고 했다. 그리고 ‘화기광’(和其光)에서 ‘화’는 ‘부드럽게 함’이나 ‘흐리게 함’을 가리킨다. 나는 앞의 것을 따랐다. 또 ‘동기진’(同其塵)에서 ‘동’은 ‘함께 하다’ 혹은 ‘균일하게 하다’ 등을 나타낸다. 나는 ‘함께 하다’를 골랐다. 그래서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고 하면 ‘자기 재주를 감추고 세속을 좇음’을 이른다. ‘담혜’(湛兮)에서 앞의 ‘연혜’와 마찬가지로 ‘혜’는 어조사이고 ‘담’은 ‘맑음’이나 ‘징청’(澄淸)을 나타내는데, 이 또한 앞의 것을 택했다. 이시환 사백이 노래한 ‘새소리를 듣고 바람의 말씀을 듣는’ 일이 모두 ‘동기진’이다.
여기서 툭, 저기서도 툭,
시위로 성장한 나라가
시위로 말라비틀어져 죽지나 않을까
심히 두렵구려.
-작품 ‘시위공화국1’ 중에서
노자 제29장 일부를 본다. ‘장욕취천하이위지 오견기부득이. 천하신기 불가위야. 위자패지 집자실지(將欲取天下而爲之 吾見其不得已. 天下神器 不可爲也. 爲者敗之 執者失之).’ 이는, <앞으로 어느 때에 하늘 아래를 얻고자 하여 ‘함’이 있다면, 나는 그 ‘이루지 못하고 말게 됨’을 볼 뿐이다. 하늘 아래는 알 수 없는 그릇이므로 ‘함이 있음’은 옳지 않다. ‘함이 있는 사람’은 지게 되고, ‘잡고자 하는 사람’은 잃게 된다.>라는 뜻이다. ‘오견기부득이’(吾見其不得已)에서 ‘부득이’는 지금의 우리가 아는 뜻으로는 ‘하는 수 없이’나 ‘마지못하여’이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부득이’는 ‘이루지 못하고 만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고전은, 지금의 말로 풀이되면 안 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후자를 따랐다. ‘신기’(神器)는 글자 그대로 ‘신비한 그릇’이다. 그런데 ‘신비하다’는 게 무슨 뜻이냐고 물으면 정확하게 할 말이 없다. 그래서 나는 ‘알 수 없다’라고 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말은, ‘천하는 인간의 계획을 초월한 불가사의한 존재’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신기’가 ‘천도와 인심’을 가리킨다고도 한다. 모두 알다시피 ‘시위’는 필요할 때가 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지나치면 안 된다. 앞의 시에서 이시환 사백은 ‘시위로 말라비틀어져 죽지나 않을까’하고 나라를 걱정한다.
누구는 바다로 산으로 강으로 피신가고
누구는 가마솥에 개와 닭을 삼고
누구는 발가벗은 채 골방에서 책을 읽고
누구는 에어컨 바람 속에 갇히어 기침을 하고
누구는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 여행 중이고--
-작품 ‘우문’ 중에서
노자 제5장 일부를 본다.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 성인불인 이백성위추구. 천지지간 기유탁약호! 허이불굴 동이유출(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天地之間 其猶橐籥乎! 虛而不屈 動而愈出).’이는,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아서 모든 것으로써 ‘말린풀 강아지’를 삼고, ‘거룩한 이’는 어질지 않아서 모든 사람들로써 ‘말린풀 강아지’를 삼는다. 하늘과 땅 사이는 마치 풀무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텅 비어 있는데 다함이 없고, 움직이는데 더함이 나타난다.>라는 뜻이다. ‘위추구’(爲芻狗)에서 ‘추구’를, ‘왕필’(王弼)은 ‘추’와 ‘구’로 보았다. 즉, ‘추’는 ‘꼴’ ‘말린 풀’ ‘마소의 먹을거리’ ‘꼴꾼’ ‘풀 먹는 짐승’ ‘짚’ 등을 나타낸다. 그리고 ‘구’는 ‘개’ ‘작은 개’ ‘강아지’ 등을 가리킨다. 그리고 성현영(成玄英)이란 사람은 ‘풀을 묶어서 개 모양을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했다. ‘추구’는 ‘제식에 쓰이는 희생(犧牲)의 대용물’을 이른다. 이는, ‘풀 강아지’를 말하는 것 같다. 이 말 모두가 ‘하찮은 존재’를 의미한다. 그러니 문득,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초개’(草芥)라는 말이 생각난다. 이 말은, ‘지푸라기’를 뜻하는데, 곧 ‘하찮은 것’의 비유로 쓰인다. 예컨대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다.’라는 말은, ‘목숨을 하찮게 버림’을 뜻한다. ‘기유탁약호’(其猶橐籥乎)에서 ‘탁약’은 ‘풀무’(바람상자)를 나타내는데, 이는 ‘속이 비어 있는 것을 취한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장자가 말했다. “풀무와 피리는 속이 비어 있는 까닭에 그 속에 자연스런 묘용이 있다.”라고 했다. 그리고 ‘허이불굴’(虛而不屈)에서 ‘굴’은 ‘굽히다’ ‘굽다’ ‘움츠리다’ ‘굳세다’ ‘다하다’ 등의 뜻을 지닌다. 나는 그 중에서 ‘다하다’를 잡았다. 여름일 때는 더워서 죽을 지경이라 차라리 겨울이 오기를 바라지만, 막상 겨울이 오면 추워서 다시 여름을 기다린다. 이렇듯 자연은 우리를 봐주지 않는다. 어쩌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에 ‘단련시키시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이시환 사백은 자문자답한다. ‘왜 무덥냐고요? 탐욕을 억제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라고.
속았구나
또 속았구나.
독버섯 같은
그 화려한 빛깔에 속고
그럴듯한 무늬에 속았구나.
속았구나
또 속았구나.
-작품 <‘순실시대’를 사며> 중에서
노자 제81장 일부를 본다. ‘신언불미 미언불신. 선자불변 변자불선 지자불박 박자부지.(信言不美 美言不信. 善者不辯 辯者不善 知者不博 博者不知).’ 이는, <믿음직한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믿음직하지 않다. 착한 사람은 말을 잘하지 못하고 말을 잘하는 사람은 착하지 못하다. 아는 사람은 배워서 익힘이 넓지 못하고 배워서 익힘이 넓은 사람은 알지 못한다.)라는 뜻이다. ‘신언불미’(信言不美)는 ‘믿음직한 말은 아름답지 않다.’라는 말이다. 그런가 하면, ‘믿을 만한 말은 좋게 들리지 않는다.’라는 풀이도 있다. 그리고 ‘미언불신’(美言不信)에서 ‘미언’은 바로 ‘감언’(甘言, 남의 마음에 들도록 꾸미는 말)을 이르는 성싶다. ‘선자불변’(善者不辯)에서 ‘변’은 일반적으로 ‘변론하다’라는 풀이를 택하고 있다. ‘변’은 ‘말 잘하다’ ‘판별하다’ ‘따지다’ ‘논란하다’ ‘다투다’ 등의 뜻이 있다. 나는 그 중에서 ‘말 잘하다’를 골랐다.
공자님도 ‘군자 욕눌어언이민어행(君子 欲訥於言而敏於行: 군자는 말을 어눌하게 하고 행동은 재빠르게 하려고 한다.)’을 강조하셨다. 남을 속이려는 말일수록 번드르르하다. 이시환 사백의 ‘속았구나, 속았구나.’가 귀에 메아리친다.
와르르 무너지는 것은 슬프다.
공든 탑이 무너지고
축대가 무너지고
일평생 쌓은 명예가 무너지고
건장했던 몸이 무너지고
정신이 무너지고
그 무엇이 또 무너져 내린다.
-작품 ‘무너짐에 대하여’ 중에서
노자 제18장 일부를 본다. ‘대도폐 유인의 지혜출 유대위(大道廢 有仁義 智慧出 有大僞).’이는, <큰 길이 무너지고 나서 ‘어짐’이니 ‘옳음’이니 하는 것들이 있게 되었고, ‘꾀’라든가 ‘슬기로움’이 나와서 ‘큰 거짓’이 있게 되었다.>라는 뜻이다. ‘대도폐’(大道廢)에서 ‘대도’를 ‘무위자연(無爲自然)의 길(道)’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그저 ‘큰 길’이라고 풀었다. 그리고 ‘지혜출’(智慧出)에서 ‘지’와 ‘혜’는 모두 ‘슬기’라는 뜻을 지닌다. 그러나 나는 이를 따로 떼어서 ‘지’를 ‘꾀’라고 하였고 ‘혜’를 ‘슬기로움’이라고 했다. 또, ‘유대위’(有大僞)에서 ‘대위’는 ‘큰 위계’라든지 ‘크게 남을 속이는 허위’라고들 하지만, 나는 그저 ‘큰 거짓’으라고 풀었다. 여기에서의 ‘위’는 ‘작위’(作爲)나 ‘인위’(人爲)의 뜻도 있다고 한다. 특히 여기에서는 ‘폐’에 주목하여야 한다. 이는 ‘무너지다’ 또는 ‘망가지다’ 등의 뜻인데, 사람들은 이리 크게 혼이 난 후에야 정신을 차리게 된다. 지금 나라에서 한다는 ‘과거 청산’이 바로 그런 것인데, 제대로 해 나갈지 두고 볼 일이다. 이시환 사백의 작품에서는 ‘오래전부터 자라온 불씨’로 지적되어 있다.
잔소리 많아지고 말끝마다 껄끄럽네
늙은이 아니랄까 오늘따라 유별나니
모두가 돌아앉아서 돌부처가 되었네.
-시조 작품 ‘모난 늙은이’ 전문
노자 제56장 일부를 본다. ‘지자불언 언자부지. 색기태 폐기문 좌기예 해기분 화기광 동기진 시위현동(知者不言 言者不知. 塞其兌 閉其門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是謂玄同).’이는,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그 구멍을 막고 그 문을 닫으며 그 날카로움을 꺾고 그 엉클어짐을 풀며, 그 빛을 부드럽게 하고 그 티끌과 함께 한다. 이를 가리켜서 ‘거무레하게 함께 함’이라고 일컫는다.>라는 뜻이다. ‘지자’(知者)는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여기에서는 ‘길(道)을 깨달은 사람’을 가리킨다고 한다. ‘색기태’(塞其兌)와 ‘폐기문’(閉其門)은 ‘태’는 ‘구멍’으로 ‘폐’는 ‘닫음’으로 풀었다. 여기에서도 그 풀이를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 ‘좌기예’(挫其銳)는 ‘그 날카로운 기운을 꺾음’을 나타낸다고 한다. 또, ‘해기분’(解其紛)에서 ‘분’은 ‘어지러워지다’ ‘섞이다’ ‘엉클어지다’ ‘많다’ ‘느슨해지다’ 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나는 그 중에서 ‘엉클어지다’를 골랐다. 일반적으로 ‘해기분’은 ‘그 분쟁을 해결한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좌기예’(挫其銳)와 ‘해기분’(解其紛), 그리고 ‘화기광’(和其光)과 ‘동기진’(同其塵) 등도 글자 그대로 풀었다. 또, ‘시위현동’(是謂玄同)에서 ‘현동’은 ‘날카롭고 둔한 것’ 또는 ‘밝고 어두운 것’ 등의 양 극단의 것을 잘 조화하여 치우치거나 부족함이 없게 동일 상태로 하는, ‘길(道)의 심원하고도 신비한 작용’을 일컫는다고 한다. 말하자면 ‘현묘한 길(道)과 하나가 된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를 ‘거무레하게 함께 함’이라고 했다. 이시환 사백의 시조는, 늙은이가 될수록 잔소리가 많아짐을 경계하는 뜻이 담겼다. ‘지자불언’이다.
특히 이시환 사백은, 말미에 ‘왕초보 이시환의 시조 습작 21수’라고 밝히며 시조를 발표하였는데, 그 솜씨가 범상치 않다. 또, 시조에 대한 이야기를 곁들이면서 ‘읽기 위한 시조 모양의 3장6구12음보를 지키거나 그것의 변형을 꾀하는 것은 이미 시조가 아니라 외형만을 모방한 시라는 것’, ‘3장의 첫 구 3음절은 고정불변이 아니라는 것’ 등을 역설했다. 나는 그 의견을 존중한다. 그러나 나는 다르다.
시조는 누가 뭐라고 해도, 정형시이다. 중국과 일본에도 정형시가 있는데, 그게 바로 중국의 ‘당시’(오언이나 칠언 절구와 율시)와 일본의 ‘하이쿠’이다. 물론, 중국의 ‘고시’도 노래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당시’로 발전하면서 정형을 완벽하게 구사했다. 하이쿠 또한, 지금 현재에도 완벽한 정형을 유지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중국 당시의 ‘오언’이나 ‘칠언’이 모두 ‘글자 수’이고 ‘하이쿠’도 ‘5, 7. 5’의 ‘글자 수’를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 그런데 우리만 왜 ‘글자 수’를 무시해야 되는가. 정형시로서 이시환 사백의 시조는 훌륭하다. 그런데 왜 파격을 허용하려고 하는지, 나는 이해하기가 힘들다. 시조에 있어서 과거에 ‘노래로 불렀던 시조’를 ‘고시조’라고 하며, 현재에 ‘노래로 부르지 않는 시조’를 ‘현대시조’라고 한다. 그러므로 ‘현대시조’는 더욱 정형을 조여야만 한다. 그게 바로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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