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문

불경탐구 '썩은 지식의 부자와 작은 실천'을 읽고

시조시인 2018. 1. 31. 13:22

(독후감)

 

불경탐구 썩은 지식의 부자와 작은 실천을 읽고

 

 

김 재 황

 

솔직한 마음인데, 이 책을 앞에 놓으니 가슴이 눌린다. 그 많은 불경의 중압감이 감히 내가 쉽사리 다가서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 불경 모두가 누군가 읽도록 만든 게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나 또한 읽지 못할 게 없지 않은가. 나는 용기를 내고 날마다 마음이 허락하는 대로 조금씩 읽어 나가기로 했다.


- 그렇다면, 숨을 어떻게 쉬는 것이 아나반나(阿那般那)삼매인가? 수행자의 수행에 맞추어서 초습생’ ‘이습생’ ‘구습생으로 구분하였고, ‘초습생이라면 한 마음으로 생각하여 들숨과 날숨을 헤아린다. 길든 짧든 하나에서 열까지 헤아린다.”는 것이고, ‘이습생이라면 하나에서 열까지 헤아려서 호흡의 들어가고 나옴에 따라 생각과 호흡을 함께 마음의 한 곳에 멈춘다.”는 것이고, ‘구습생이라면 (헤아림) (멈추게 함) (비추어 봄) 전관(굴려 봄) 청정(깨끗함)의 아나반나삼매의 여섯 가지 문을 열여섯으로 나누라.”는 것이다.(49) -

 

나는 이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였다. , 싯다르타는 감식과 병행하여 다냐’, 선정’(禪定)을 실행하기로 했다. 이 선정의 수행방법은 바로 아나파나였는데, ‘아나들이쉬는 숨을 나타내고 파나내쉬는 숨을 나타낸다고 한다. 음역으로는 안나반나’(安那般那)라고 하는 지식선’(止息禪)이었다고 말한다.

싯다르타는 이를 악물고 혓바닥을 가볍게 입천장에 댄 채로 숨을 죽였다. 온 몸에 땀이 송알송알 솟았다고 한다. 숨을 멈추는 고행을 할 때에는 두 귀에서 큰 소리가 나며 사나운 바람이 빠져나가는 듯싶다고도 한다. 그런가 하면 날카로운 칼로 머리를 저미는 성싶은 강한 바람이 머리 안에서 소용돌이를 일으키기도 했다고 한다..

 

- 어느 한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몸과 마음을 집중하여 온전히 몰입된 상태를 나는 삼매라 한다. 때문에 삼매는 환각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적지 않다. 삼매에는 그 목적에 따라서 수없는 종류가 있을 수 있는데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삼매 가운데에는 이러한 것도 있다. 곧 부처님의 마지막 제자가 된 120살 먹은 수발타라라는 사람이 부처님 앞에서 보여주었다는, 소위 화계삼매이다.(54) -

 

나는 삼매를 팔리어 삼마디로 이해하고 있는데, 선정에 있어서 삼마디로 들어가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호흡에 집중하면 개념적인 일들이 사라지며, 정신이 한 곳으로 모이고 모든 뜨거움이 수그러들어서 맑은 마음을 지닐 수 있게 된다고 한다. 또한, 고행에 있어서 그 아픔이 크면 클수록 삼마디에 쉽게 이를 수 있고, 그 상태가 되면 마음이 고요해져서 모든 잡념들을 없어지게 만들며, 정신이 바르게 깨어나서 사랑과 미움을 모두 버린 깨끗한 마음에 도달하게 된다고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삼마디’, 삼매에 항상 머물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싯다르타가 마지막 여행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 당시 쿠시나라마을에 수밧다라는 방랑 수행자가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날 밤에 싯다르타가 니르바나에 들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래서 수밧다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나이 든 스승 가운데 스승이라고 할 만한 방랑수행자들이 바른 깨달음을 얻은 이께서 예전에 나타나셨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사문 고타마는 바로 그 깨달음을 얻은 이라고 일컬어지는 분인데, 그분이라면 나의 오랜 의문을 풀어 주시고 진리를 설명해 줄지도 모른다.”

수밧다는 서둘러서 살라숲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는 싯다르타로부터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에 대한 가르침을 어렵게 들었다. 그 이야기가 마하파리닙바나 숫다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수밧다는 여러 수행자들과 떨어져서 홀로 지내며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마음의 수행에 매진하였다. -그리하여 저 위없는 청정행이라고 하는 궁극의 목표를 현세에서 스스로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생존은 다하였다. 청정행은 이미 확립되었다. 해야 할 일은 모두 다 마쳤다. 더 이상 이와 같은 상태에 돌아오지 않는다.’라고 깨달았다. 수밧다는 존경받을 자격이 있는 진실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싯다르타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다.>

이밖에 나는 수밧다에 대해 더 아는 바가 없다.

 

-장아함 반니원경에 의하면, 부처님이 아난다와 함께 콜리성북쪽 나무 아래에 머무시며 비구들에게 계() () ()의 의미와 그 중요성에 대하여 설명하였고, ‘녹야원에 계실 때에도 이교도 카샤파의 질문을 받고도 계() () ()의 삼매에 대해 설명하셨는데, 그를 간단히 줄여서 말하자면 계()란 부처님이 주신 계율을 잘 지키며 실천하는 것이고, ()이란 좌선을 통해서 선정(禪定)에 드는 일이며, ()란 선 수행과정에서 깨우쳐 지혜를 얻는 일이다.(74) -

 

나는 이를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상윳타 니카야에서 나타난 건강실라라는 말로 ()’이고, ‘정신통일삼마디라는 말로 ()’이며, ‘바른 앎판나라는 말로 ()’라고 한다. 싯다르타는 이 삼학(三學)을 닦음으로써 청정한 경지에 도달하였다고 노래했다. 그리고 이 청정한 경지무아(無我)’에 이르는 길이며, 무아행(無我行)’이 다름 아닌 자비(慈悲)의 실천이라고 생각했다.

 

-부처님은 인간의 육체를 한낱 썩어 없어질, 더러운 것들을 가득 담고 있는 가죽주머니정도로 빗대어 말하기를 좋아하셨다. 요즘 사람들이 이 말을 들으면, ‘미친,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일축해 버릴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은 그 몸이 바로 상품이고, 그 상품을 위해서 평생 신경 쓰고 가꾸며 살아간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뿐 아니라 그만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88) -

 

싯다르타가 핍팔라나무를 바라보며 앉아 있을 때, 검은 마음 파피야스가 젊은 세 딸로 변하여 싯타르타를 유혹하였다. 싯타르타는 강하게 머리를 흔들며 다음과 같은 시를 힘있게 읊었다.

칼날에 발린 꿀은 혀를 상하게 하고, 오욕에 물들음은 신통을 흐리는구나. 나는 모든 번뇌를 떠난 지가 오래되었거늘, 이제 다시 독의 불덩이로 뛰어들까 보냐. 세상의 오욕이 여러 사람을 불태우는 게, 세찬 불이 마른 풀을 태우는 것 같구나. 너희들의 몸뚱이는 허환이요 실체가 없으니, 파도의 거품과도 같이 오래 머물 수가 없다. 너희들의 엉킨 핏줄과 뼈대와 살은 사대와 오온의 가합일 뿐, 어찌 내가 범부들처럼 욕심을 내겠는가. 채색한 항아리 속의 독사들이여! 똥 찌꺼기 가득 찬 가죽주머니에 불과한 그대들이여! 나는 공중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바람과 같으니, 그대들의 애욕으로는 영원히 날 묶어 두지 못하리.’

 

- 부처님은 여성에 대해, 그러니까 여자라는 존재에 대해서 아주 부정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주장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무슨 소리냐?’고 항의성 질문을 하겠지만 그 동안 내가 읽은 경()들과 율()에서는 분명 그러하다. 그렇다면 그들 경과 율의 내용 중에서 어떠한 면들이 그 같은 판단을 가능하게 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108) -

 

싯다르타는 여자 수행자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양어미니인 마하프라자파티샤카족의 여인들이 하도 조르기에 하는 수 없이 까다로운 조건을 달고 출가함을 허락했다. 이 일을 생각해 보면, 여자를 몹시 차별한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하다. 어느 한가한 때에 싯다르타는 그 이유를 사촌동생인 아난다에게 다음과 같이 들려주었다.

아난다야, 만약에 여자들이 출가하지 않았다면 바른 법이 천 년은 이어졌을 게다. 그러나 여자가 출가하게 됨으로써 바른 법은 오백 년밖에 이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여자가 많고 남자가 적은 집안에 도둑이 잘 드는 바와 같이, 여자의 출가로 해서 수행의 순결을 지키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큰 연못 둘레에 미리 둑을 쌓아서 물의 넘침을 막듯이, 나는 여자 수행자들에게 이 여덟 가지 조항을 두었다.”

 

- 거짓말이 없으면 종교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다.’라는 이 무서운 말은, 내가 오랫동안 경전을 읽으며 그 문장을 분석하는 일에 매달리어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살 때에 집사람이 내게 던진 말이다.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믿고 싶은 것이 바로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데 왜 당신이 나서서 그것을 허물어뜨리려고 애를 쓰느냐는 투였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응수하기를, ‘만약에 신이 존재한다면 그저 자신의 말에 맹종하는 이들보다 가타부타 따지고 질문하고 비판하는 나 같은 어린애를 더 좋아하지 않겠느냐?’고 했다.(132) -

 

그렇다. 종교라는 것은 거짓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케리그마(kerygma)라는 선포 양식이 있기 때문이다. ‘케리그마란 그리스어 케루세인이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 ‘전령관으로서 임무를 다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한다. 영어로 ‘preach'라고 번역되지만, 일반적인 설교와는 의미가 다르다고 한다. 어떤 공적인 사자(使者)가 어떤 일정한 소식을 가지고 공중 앞에서 외쳐서 선포하는 일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일정한 양식이 있는데, 그 구성은 초자연적인 사태의 유무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기독교 성서의 경우에, 역사적 사실의 정보를 전하는 문헌이 아니라,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선포하여 신앙을 전하기 위함이라는 거다. 나는 이를 쉽게 말해서, 신비로움을 가미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의지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사실, 우리가 있다고 인지하는 마음이란 끊임없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마음의 현상을 뿐이듯이 불이란 것도 불의 현상일 뿐으로 있다가도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것이고, 사라졌다가도 언제든 다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이 나오는 바탕은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 볼 수 없고 확인할 수 없지만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나는 마음과 불을 생각했고, 그것들을 일어나게 하고 사라지게도 하는 근원으로서 바탕인 마음과 불을 생각했던 것이다. 이 둘을 같은 단어인 마음로써 표현하다 보니 심히 헷갈리는 것이다.(178)

   

어느 날 밤이었다. 싯다르타는 산 위에서 멀리 내려다보이는 가야의 불빛을 가리키며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수행자들이여! 모든 것은 불타고 있다. 모든 게 불타고 있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눈은 불타고 있다. 눈의 식별작용은 불타고 있다. 눈의 대상과 식별작용의 부딪침은 불타고 있다. 눈의 부딪침에 의해서 생겨난 즐거움이나 괴로움,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감정 등의 느낌 이것도 불타고 있다. 그 불이란 어떤 불인가? 탐욕의 불, 혐오의 불, 미혹의 불이다. 그리고 태어남, 노쇠함, 죽음, 근심, 슬픔, 고통, 번뇌와 번민의 불에 의해서 뜨겁게 활활 타오르고 있다.’

인간은 번뇌와 번민의 불에 의해서 타오르고 있다.’는 시의 문구가 가슴에 긴 여운을 끌며 감긴다. ‘끝없는 탐욕으로 괴로움을 지니게 된, 우리가 그 탐욕을 벗어 버림으로써 괴로움을 없애는 것이게 바로 싯다르타의 가르침에 있어서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 부처가 왕자 출신이기에 왕과 왕실에 대해서 비교적 많이 알고 있다는 점과, 실제로 왕들의 요청으로 설법 강론함으로써 자문 역할을 해준 현실적인 이유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그 지체 높은 왕들에까지 설법을 하고 자문해 주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부처님의 위상과 그의 가르침이 실로 위대하다는 점을 직간접적으로 시사해 주기 위함도 작용했을 것이다.(400) -

 

이미 알고 있듯이, 인도 나라에는 이른바 카스트제도가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제일 위에 속하는 계층을 브라만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다음이 크샤트리아이고 또 그 다음이 바이샤이며 그 아래에 수드라가 있다. 다시 자세히 설명하면, ‘브라만은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계급이고, ‘크샤트리아는 왕족이나 무사 계급이며, ‘바이샤는 서민 계층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 아래에의 수드라는 노예 계층이다. 물론 수드라밑에 카스트축에도 들지 못하는 불가촉천민이 있었다. 그러니 왕족은 당연히 둘째 계급인 크샤트리아이다. 싯다르타는 크샤트리아계급이었으므로 종교적으로는 지체 높은계층이 아니다. 그렇기에 싯다르타는 브라만들에게 많은 수난을 당했다. 아마도 내 생각에 왕들이 싯다르타에게 가르침을 받으려고 한 까닭은, 자기와 같은 크샤트리아였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브라만은 왕들에게 매우 거만했을 거다. 자기 아래의 계급이었기 때문이다.

 

- 다섯 번째 경인 춘다경에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대장장이 아들 춘다가 부처님께 세상에는 어떤 수행자들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부처님이 그에게 대답하기를 네 부류의 수행자가 있지만 다섯 번째는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422) -

 

싯다르타의 마지막 여행에서 파바마을에 도착하여 대장장이(그 아들, 또는 금속세공인) ‘춘다의 망고 동산에 머무르게 되었다. ‘춘다는 싯다르타와 그의 벗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하고자 했다. 그날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싯다르타와 춘다는 귀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 내용이 숫타니파타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금속세공인인 춘다가 말했다. “스승이여, 욕망에서 해방된 사람, 최고의 인간, 가장 위대한 인도자인 당신에게 묻습니다. 이 세상에는 몇 종류의 수행자들이 있습니까?”>(숫타니파타83)

<스승이 답하였다. “춘다여, 이 세상에는 네 종류의 수행자가 있습니다. 첫째는 진리의 승리자이고, 둘째는 진리를 말하는 자이며, 셋째는 진리대로 사는 자이고, 넷째는 진리를 더럽히는 자가 그것입니다.”>(숫타니파타84)

이를 시작으로 깊은 대화가 이루어졌다. 이윽고 음식이 모두 준비되었다. 그런데 그 많은 음식 중에는 수카라 맛다바라는 음식도 있었다. 많은 기록 중에는 이 음식을 버섯 요리라고도 하고 돼지고기 요리라고도 한다. 나는 버섯 요리로 알고 있다. 이 당시에 싯다르타는 이미 노환으로 기력이 탕진된 상태였는데, 이 요리를 먹고 심한 설사를 일으켰다. 결국 이것이 단초가 되어 싯다르타는 열반을 하게 된다. 그에 앞서 싯다르타는 춘다가 그의 벗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됨으로써 그가 공양에 대하여 후회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난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아난다야, ‘춘다에게 가서 이렇게 말을 전해 다오. ‘선생님께서 그대가 올린 마지막 공양을 잡수시고 반쯤 열반하신 일은 그대에게 이익이고 이득이다. 춘다여! 나는 선생님에게서 이렇게 들었다. 두 가지 공양은 아주 똑같은 결과를 가져오며 아주 똑같은 과보를 가져온다. 어떠한 것이 두 가지 공양인가? 선생님이 그 음식을 잡수시고 위없는 깨달음을 얻으신 것, 그리고 그 음식을 잡수시고 미혹한 생존의 근거를 남기는 일 없이 완전한 열반의 영역에 드신 것, 그 두 가지이다. 춘다는 안락함을 낳는 업을 쌓았다.’라고. 아난다여, 이와 같이 말하여서춘다후회하는 마음을 없앨 수 있도록 해 다오.”

싯다르타의 이 어진 마음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진다.

이시환 사백이 쓰신 불경탐구 썩은 지식의 부자와 작은 실천을 읽고, 위대한 싯다르타를 그리워하며, 남은 생애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한 번 더 짚어 보게 되었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 사백께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리며 이로써 두서없는 독후감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