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문

이시환 시인 신작세계 '자유서정시' 5편에 대한 감상문 '장자, 그 가슴에 닿다'

시조시인 2018. 10. 8. 04:43

                      이시환 시인 신작세계 자유서정시’ 5편에 대한

                               감상문 장자, 그 가슴에 닿다

 

                                                                                                                                김 재 황

 

동방문학 2018. 10 ~ 2018. 11 통권 제87호에는 이시환의 신작세계를 엿보다라는 타이틀로 자유서정시 5편과 3행시 3편 및 시조 3편이 실렸다. 그 중에서 나는 자유서정시에 관심이 쏠렸다. 그 까닭은, 내가 평소에 자주 읽는 장자의 글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크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장자(莊子- 장 선생님)의 이름은 ’()라고 한다. 전국시대 송()나라의 ’()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은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상구시(商邱市) 북동쪽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고향에서 하급관리로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나라 위왕(威王) 시대에 활동했다고 하나, 그 시기가 명확하지는 않다. 맹자 조금 뒤에 활동했다는 추측도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지역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사상이 달랐으므로 서로 알지는 못했을 것 같다고 여겨진다. 노자의 사상을 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장자는 내편과 외편 및 잡편의 모두 33가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으나 여기에서는 내편만을 살펴보았다.

그러면 지금부터 이시환 시인의 자유서정시 각 작품과 장자의 여러 이야기에 대한 연결고리를 찾아보고자 한다.

 

번개, 질긴 어둠을 칼날로 찢고

천둥, 소름이 돋도록 공포를 찍어 바른다.

 

더욱 거칠게 쏟아지는 폭우,

물폭탄이 곧 큰일을 낼 것만 같다.

 

잠시 후, 빨간 페인트 통을 엎지르며

질주하는 경찰차의 비상 경고음

 

그 너머로 빛바랜 그림처럼

정적이 도심의 복부를 짓누른다.

-작품 기습폭우 내리던 날 밤전문

 

 

장자의 제6큰 마루 스승’(大宗師)의 한 부분을 본다.

子輿與子桑友, 而霖雨十日. 子輿曰 子桑殆病矣!” 裹飯而往食之. 至子桑之門, 則若歌若哭, 鼓琴曰, “父邪! 母邪! 天乎! 人乎!” 有不任其聲而趨擧其詩焉. 子輿入曰 子之歌詩, 何故若是?” 吾思夫使我至此極者而不得也. 父母豈欲吾貧哉? 天無私覆, 地無私載, 天地豈私貧我哉? 求其爲之者而不得也. 然而至此極者, 命也夫!”(자여여자상우, 이림우십일. 자여왈 자상태병의!” 과반이왕사지. 지자상지문, 즉약가약곡, 고금왈, “부야! 모야! 천호! 인호!” 유불임기성이추거기시언. 자여입왈 자지가시, 하고약시?” 오사부사아지차극자이부득야. 부모기욕오빈재? 천무사복, 지무사재, 천지기사빈아재? 구기위지자이부득야. 연이지차극자, 명야부!”) 

 

이에 대한 풀이는 다음과 같다.

자여와 자상은 함께 벗하였고, 열흘이나 장맛비가 그치지 않고 내리자, 자여가 말했다. “자상은 지쳐서 괴롭겠지.” 밥을 싸 가지고 먹이고자 갔다. 자상의 집 앞에 이르니, 노래하는 듯 우는 듯 거문고를 뜯으며 이야깃거리로 말을 시작했다. “아버지인가! 어머니인가! 하늘일까! 사람일까!” 그 소리를 (힘에 부쳐서) 어쩌지 못하고 그 시()를 달아나듯 일으킴이 있는데, 자여가 들어가서 말했다. “자네가 시()를 노래함이 무슨 까닭에 이와 같은가?” (자상이) 말했다. “내가 무릇 나로 하여금 이런 막바지에 이르게 한 것을 헤아려 보았는데 알아내지 못했네. 어버이라면 어찌 내가 가난하기를 바라시겠는가? 하늘은 사사롭게 덮어 줌이 없고 땅은 사사롭게 실어 줌이 없으니, 하늘과 땅인들 어찌 사사롭게 나를 가난하게 하겠는가? 이렇게 한 것(사람)을 찾아보았으나 알아내지 못했네. 그러한데 이런 막바지에 이른 것은 어쩔 수 없이 가야 할 길’(운명)인가 보네!”

이 글에서 자상태병의!’(子桑殆病矣!), 자상은 지쳐서 괴롭겠지.’가 시의 둘째 연 둘째 줄의 물폭탄이 곧 큰일을 낼 것만 같다와 연결된다. 물론, 시의 물폭탄임우십일’(霖雨十日)이다. 그리고 시의 마지막 연 마지막 줄에서 정적대체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라는 절규를 나타낸다. 그게 장자에서는 부야! 모야! 천호! 인호!’(父邪! 母邪! 天乎! 人乎!)로 나타나 있다. , ‘아버지인가! 어머니인가! 하늘일까! 사람일까!’이다.

기습폭우는 늘 두렵다. 그럴 때 우리는 하늘이 노했다!’라는 말을 하곤 한다. 우리의 잘못이 있기 때문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아무리 자연현상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한 일과 아무 관련이 없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자연의 파괴가 이런 재해를 부추기는 원인이 될 듯싶다. 우리가 일컫기를 하늘은 아버지요, 땅은 어머니라고 한다. 장자의 부모기욕오빈재?’(父母豈欲吾貧哉? 어버이라면 어찌 내가 가난하기를 바라시겠는가?)에서 노자(57)천하다기휘 이민미빈’(天下多忌諱 而民彌貧. 하늘 아래 하지 말라고 하는 게많으면 두루 가난해진다.)을 떠올리게 된다. ‘가난함은 곧 어려움이니, 어찌 하늘과 땅이 우리를 어렵게 만들겠는가? 우리는 하지 말라!’는 말보다는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도록 해야 한다.

 

하하, 이놈 참 잘 생겼구나.

앞에서 보나 뒤에서 보나 가지런하고

촘촘하게 박혀있는 알갱이들이

저마다 하나의 뜻을 세우고

그 뜻이 모여 하나의 사상을 이루었구나.

 

하하, 그놈 참 매끄럽게 잘도 빠졌구나.

찰찰 윤기 넘치고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그 알갱이들의 전후좌우 뜻을 모아

비로소 하나의 사상이란 큰 집을 지었구나.

-작품 옥수수를 삶아먹으며중 일부

 

장자의 제5베풂이 가득한 바로 그것’(德充符)의 한 부분을 본다.

仲尼曰 丘也嘗使於楚矣, 適見㹠子食於其死母者, 少焉眴若皆棄之而走. 不見己焉爾, 不得類焉爾. 所愛其母者, 非愛其形也, 愛使其形者也. 戰而死者, 其人之葬也不以翣資. 刖者之屨, 無爲愛之, 皆無其本矣. 爲天子之諸御, 不瓜翦, 不穿耳. 取妻者止於外, 不得復使. 形全猶足以爲爾, 而況全德之人乎! 今哀駘它未言而信, 無功而親, 使人授其國, 唯恐其不受也, 是必才全而德不形者也.”(중니왈 구야상시어초의, 적견돈자식어기사모자, 소언순약개기지이주. 불견기언이, 부득류언이. 소애기모자, 비애기형야, 애사기형자야. 전이사자, 기인지장야불이삽자. 월자지구, 무뮈애지, 개무기본의. 위천자지제어, 불과전, 불천이. 취처자지어외, 부득복사. 형전유족이위이, 이황전덕지인호! 금애태타미언이신, 무공이친, 사인수기국, 유공기불수야, 시필재전이덕불형자야.”)

 

이에 대한 풀이는 다음과 같다.

노나라 애공(哀公) 임금에게 중니(공자)가 말했다. “는 일찍이 초나라로 나라 심부름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마침 새끼돼지들을 보았는데, 죽은 어미의 젖을 빨아먹다가 조금 뒤에 깜짝 놀라서 죽은 어미를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자기를 보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고 같지 않음을 깨달았기 때문일 뿐입니다. 그 어미를 아끼는 마음이 있는 것은, 그 꼴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 꼴을 움직이게 하는 것을 사랑하는 겁니다. 나라싸움에서 죽은 사람은 그를 장사지낼 때에 운삽(발인할 때 영구의 앞뒤에 세우고 가는 제구)을 부장품으로 넣지 않습니다. 발꿈치가 잘리는 벌을 받은 사람의 가죽신은 아끼지 않으니, 모두 그 뿌리를 잃었기에 그렇습니다. 천자의 궁녀로 가는 모든 여자들은 손톱을 자르지 않고 귀를 뚫지 않습니다. 아내를 얻은 사람은 밖에 머물고 (일을 끝낸 뒤에) 연거푸 시키는 일’(밤에 하는 일)을 얻지 않습니다. 몸을 본바탕대로 고스란하여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할 수 있음으로써 넉넉한데 하물며 베풂이 고스란한 사람이겠습니까! 지금 애태타가 말을 하지 않아도 믿음을 얻고 이룸이 없어도 가까이 하며, 사람(임금)으로 하여금 그 나라를 맡기게 하면서도 오직 그가 받아들이지 않을까 두려워하게 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재주와 재능이 본바탕대로 고스란하여 베풂을 드러내지 않은사람일 겁니다.”

시의 첫 연과 둘째 연 모두가 옥수수의 가지런하게 붙어 있는 알갱이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내가 느끼기에는 나란히 엎드려서 어미돼지의 젖을 빨고 있는 새끼돼지들의 모습이 영락없다. 장자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옥수수 알갱이들이 아름답게 붙어 있는 것은 그 옥수수의 대가 살아 있을 때를 가리킨다. 옥수수 대가 죽고 나면 그 알갱이들은 흩어져 버린다. 그래야 씨를 맺기 때문이다. 결국으로 아름다움이란 그 꼴에 있는 게 아니라 그 목숨에 있다고 여겨진다. (생략된 부분)에 담겨 있는 굶주린 짐승들도 먹이고 기름이라도 짜서/ 세상의 목구멍을 매끄럽게 적셔주는일이 목숨과 연결된다.

장자의 글에 나오는 애태타’(哀駘它)위나라 사람으로 아주 못생긴 사람이지만 그와 함께 머물러 본 사람은 결코 그를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 까닭이 베풂에 있었다고 하니, 옥수수의 아름다움 역시 배고픈 사람에게 큰 베풂을 베풀기 때문일 듯싶다.

 

그 맛에 홀리고

그 인심에 반하고

그 우스갯소리에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한 잔 더에 취해서

그 집을 나와 갯바람을 쐬는데

내 둥둥거리는 발걸음마다

얕은 바닷물이 철썩, 철썩거리네.

 

깊은 바다 속 풍파를 다 짓눌러 놓고

아니, 아니, 세상 시끄러움을 깔고 앉아서

두 눈을 지그시 내리감고 있는,

靜默治道 난해한 네 글자가 제각각

한 폭의 그림 속 백발의 늙은이 되어

비틀비틀 내게로 다가오네.

-작품 정묵치도중 일부


장자의 제4사람 사이에 사는 곳’(人間世)의 한 부분을 본다.

言者, 風波也, 行者, 實喪也. 夫風波易以動 實喪易以危. 故忿設無由, 巧言偏辭. 獸死不擇音, 氣息茀然, 於是並生心厲. 剋核太至, 則必有不肖之心應之, 而不知其然也. 苟爲不知其然也, 孰知其所終! 故法言曰 無遷令, 無勸成, 過度益也.’ 遷令勸成殆事, 美成在久, 惡成不及改, 可不愼與! 且夫乘物以遊心, 託不得已以養中, 至矣. 何作爲報也! 莫若爲致命, 此其難者.”(“언자, 풍파야, 행자, 실상야. 부풍파이이동 실상이이위. 고분설무유, 교언편사. 수사불택음, 기식발연, 어시병생심려. 극핵태지, 즉필유불초지심응지, 이부지기연야. 구위부지기연야, 숙지기소종! 고법언왈 무천령, 무권성, 과도익야.’ 천령권성태사, 미성재구, 악성불급개, 가불신여! 차부승물이유심, 탁부득이이양중, 지의. 하작위보야! 막약위치명, 차기난자.”)

 

이에 대한 풀이는 다음과 같다.

말이라는 것은 세찬 바람과 거친 물결이고, (말대로) 하여 나간다는 것은 참되고 옹골차거나 잃고 달아남입니다. 무릇 세찬 바람과 거친 물결은 움직이기 쉽고, ‘참되고 옹골차거나 잃고 달아남은 마음을 놓을 수 없게(위태롭게)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섭섭하고 아까워서 성내는 마음이 일어남은 까닭이 (따로) 없고 꾸미는 말과 치우치는 말씨 때문입니다. 짐승이 죽을 때는 아무렇게나 마구 짖어서 숨소리가 거칠어지는데, 여기에서 사나운 마음이 함께 태어납니다. 지나치게 꾸짖고 따짐이 큼에 이르면 반드시 어리석은 마음으로 따라 움직이게 되어서 그게 그런 줄 알지 못하니, 참으로 그게 그런 줄 알지 못한다면 누가 그 끝나는 바를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본받을 말이 이르기를 임금의 명령을 멋대로 바꾸지 말고, 억지로 이루도록 부추기지 마라. 정도에 지나치면 넘치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명령을 바꾸거나 억지로 이루도록 부추기는 것은 마음을 놓을 수 없는(위태로운) 일입니다. 멋지게 일이 이루어지는 데에는 오랜 기다림이 있어야 하고 일이 나쁘게 이루어지면 미처 고치지 못하니, 어찌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무릇 노니는 마음으로써 모든 것에 따르고 마음 비우기를 기르게 됨으로써 어찌할 수 없음에 맡기면 깊을(지극할) 것이니, 어찌 꾸며서 알리겠습니까! ‘하라고 시키는대로 알리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는데, 이게 어려운 일입니다.”

이는, ‘’()이라는 지역을 다스리는 대부 자고’(子高)가 제나라 사신으로 가게 되었을 때, 그와 나눈 공자의 말이다.

시의 제목인 정묵치도’(靜默治道)를 나는, ‘고요함과 잠잠함이 길을 다스린다.’라고 풀이하여 보았다. 그렇기에 장자에서 공자는 말이라는 것이 세찬 바람과 거친 물결과 같기에 위태롭게 되기 쉽다.’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둘째 연의 정경은 사뭇 다르다. 아침나절에 배를 타고 나가서 낚시로 잡아온 회를 안주 삼아서 술 한 잔 걸치는 모습이다. 안주가 좋으니 술맛은 더 좋고 자연히 말도 많아지게 된다. 그 때, 벽에 걸린 액자 안의 글이 고요하고 잠잠함을 들고 노인양반처럼 지팡이를 짚고서 다가온다. 기가 막힌 대비이다.

장자의 언자, 풍파야, 행자, 실상야. 부풍파이이동 실상이이위’(言者, 風波也, 行者, 實喪也. 夫風波易以動 實喪易以危. 말이라는 것은 세찬 바람과 거친 물결이고, 하여 나간다는 것은 참되고 옹골차거나 잃고 달아남이다. 무릇 세찬 바람과 거친 물결은 움직이기 쉽고 참되고 옹골차거나 잃고 달아남은 마음을 놓을 수 없게 되기 쉽다.)에서 노자(62)미언가이시 존행가이가인’(美言可以市 尊行可以加人. 아름다운 말씀은 팔 수 있고 훌륭한 행함은 말 그대로 틀림없이 다른 사람에게 더할 수 있다.)을 생각하게 된다. 정말이지, 아름다운 말은 쉽게 들을 수 있지만, 아름다운 행함은 참으로 보기 어렵다. 말이 바람결 같기 때문이다.

 

바람의 언덕 위로 올라가

바람 속으로 숨어들고 싶다.

 

그리하여 나도

보이지 않는 바람이 되어

 

세상을 한 바퀴 돌아 나오면서

어루만지는 것들마다

 

나직한 풍경소리에 눈을 뜨는

부드러운 연초록 솔잎이 될까.

-작품 바람의 언덕을 오르며중 일부

 

 

장자의 제1슬슬 거닐며 노닐다’(逍遙遊)의 한 부분을 본다.

夫列子御風而行, 泠然善也, 旬有五日而後反. 彼於致福者, 未數數然也. 此雖免乎行, 猶有所待者也. 若夫乘天地之正, 而御六氣之辯, 以遊無窮者, 彼且惡乎待哉! 故曰, “至人無己, 神人無功, 聖人無名.”(부렬자어풍이행, 령연선야, 순유오일이후반. 피어치복자, 미삭삭연야. 차수면호행, 유유소대자야. 약부승천지지정, 이어육기지변, 이유무궁자, 피차오호대재! 고왈, “지인무기, 신인무공, 성인무명.”)

 

이에 대한 풀이는 다음과 같다.

무릇 열 선생’(列子)은 바람을 거느리고 다녔으며 팔랑팔랑 가볍게 날아다니는 모습이 멋졌는데, (날아갔다가) 15일 이후에 다시 돌아온다. 그는 이 땅의 좋은 일이 있기를 바라는 바에 허둥지둥하지 않는다. 이는(이런 이는), 비록 걸어 다니는 것에서는 벗어났지만, 아직도 기다리는 바가 있는 사람이다. 만약에 하늘과 땅의 올바름을 타고 여섯 기운의 바뀜을 부리며 끝이 없는 것에 노니는 사람이라면 그가 또한 어찌 기다리겠는가! 그래서 말한다. “‘이르는 이’(至人)는 자기가 없고 베풂이 아주 높은 사람’(神人)이룬 게없으며 거룩한 이’(聖人)는 이름이 없다.”라고.

장자의 글에서 열자(列子), 열 선생바람을 거느리고 팔랑팔랑 가볍게 날아다닌다.’라고 했으니, 그게 바로 시에서 보이지 않는 바람이 되어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그 열자도 기다리는 바가 있다는데, 시에서는 솔잎이 될까라고 노래한다.

장자의 령연선야’(泠然善也, 팔랑팔랑 가볍게 날아다니는 모습이 멋지다.)에서, 나는 노자(2)천하개지미지위미 사오이 개지선지위선 사불선이’(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를 생각하게 된다. 이는, ‘하늘 아래에서 모두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운 줄로 알지만 그것은 더러울 뿐이다. 모두 멋진 것을 멋진 줄로 알지만 그것은 멋지지 않을 뿐이다.’라는 뜻이다. 우리는 조금만 뛰어나도 멋지다고 야단이지만, 우리보다 조금 더 기능이 뛰어난 생명체가 있어서 우리를 바라본다면 우리가 멋지다고 말하는 그것 모두가 그저 하찮을 뿐이지 않겠는가. 그러니 모두 겸손해야 한다는 말일 것 같다.

 

태풍처럼 오시옵소서.

그리하여 목이 뻣뻣한 나부터

꺾으시옵소서.

 

태풍처럼 오시옵소서.

그리하여 고개 숙일 줄 모르는 것들을

쓰러뜨리옵소서.

 

태풍처럼 오시옵소서.

태풍의 눈이 되어 오시옵소서.

나의 임이시여.

-작품 임이시여전문

 

장자의 제2가지런한 것을 말하다’(齊物論)의 한 부분을 본다.

子游曰 敢問其方.” 子綦曰 夫大塊噫氣, 其名爲風. 是唯無作, 作則萬竅怒呺. 而獨不聞之翏翏乎? 山林之畏隹, 大木百圍之竅穴, 似鼻, 似口, 似耳, 似枅, 似圈, 似臼, 似洼者, 似汚者. 激者, 謞者, 叱者, 吸者, 叫者, 譹者, 宎者, 咬者, 前者唱于而隨者唱喁, 泠風則小和, 飄風則大和, 厲風濟則衆竅爲虛. 而獨不見之調調, 之刀刀乎?”(자유왈 감문기방.” 자기왈 부대괴애기, 기명위풍. 시유무작, 작즉만규노효. 이독불문지료료호? 산림지외최, 대목백위지규혈, 사비, 사구, 사이, 사계, 사권, 사구, 사와자, 사오자. 격자, 효자, 질자, 흡자, 규자, 호자, 요자, 교자, 전자창우이수자창우. 령풍즉소화, 표풍즉대화, 려풍제즉중규위허. 이독불견지조조, 지도도호?”)

 

이에 대한 풀이는 다음과 같다.

(자유)이 말했다. “감히 그 길(방법)을 여쭙습니다.” 자기가 대답했다. “무릇 큰 흙덩이(대지)가 내쉬는 숨은 그 이름을 바람이라고 한다. 이게 오직 짓지 않으면 그만이나 지으면 갖가지 구멍이 사납게 부르짖는다. 너만 어찌하여 바람이 세게 부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가? 산 숲의 언덕에서 백 아름이나 되는 나무의 구멍은 코와도 같고 입과도 같고 귀와도 같고 목이 긴 병’(또는 서까래)과도 같고 우리(또는 그릇)와도 같고, 깊은 웅덩이 같은 것이 있으며 얕은 웅덩이 같은 것도 있다. 물이 세차게 흐르는 소리나 화살이 날아가는 소리나 나무라며 꾸짖는 소리나 들이마시는 소리나 부르짖는 소리나 울부짖는 소리나 바람이 굴속을 지나는 소리나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나는데, 앞에 있는 것이 -’라고 크게 외치면 뒤에 있는 것이 !’라고 맞장구친다. 소슬바람은 작게 답하고 회오리바람은 크게 답하니, 사나운 바람이 그치면 뭇 구멍이 비게 된다. 너만 홀로 어찌하여 크게 흔들리거나 작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지 못했는가?”

장자에서 자기남곽자기, ‘남쪽 외성에 사는 자기라는 이름의 사람을 뜻한다고 한다. ‘남곽내성외곽(內城外郭)으로 성곽의 남쪽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 ‘내성에는 주로 상층민들이 살고 있었으며 외곽에는 주로 하층민이나 천민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자유안성자유’(顔成子游)를 가리킨다고 본다. ‘안성’()이고 자유’()이며 이름은 ’()이라고 한다. ‘자기라는 사람의 제자라고 하는데, 나는 공자의 제자인 자유를 떠올린다. 공자의 제자인 자유는 그 자()자유’(子游)이고 성()’()이며 이름도 ’()이었다. 그래서 언언’(言偃)이라고 했다.

시에서 태풍, 기상학에서 말하는 북태평양 남서부에서 발생하여 아시아 대륙 동부로 불어오는 맹렬한 열대성 저기압을 말한다. 그러하기에 태풍의 눈이 명시되어 있다. 그 태풍은 바로 임이 오시는 모습이다. 고개가 뻣뻣하여 고개 숙일 줄 모르는 것들을 쓰러뜨리려고 오는 임이다. 이 시의 임은 그냥 사모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꾸짖으려고 오시는 표상적인 절대자로 보인다. 그런데 장자에서 자기무릇 큰 흙덩이가 내쉬는 숨이라고 정의한다. 흙덩이의 숨인 바람은 사납게 부르짖는다. 이게 쓰러뜨리려고 옴과 맞닿는다.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정적이 감돌겠지만, 사나운 바람이 그치면 뭇 구멍이 비게된다.

는 절대로 단순한 게 아니다. 씌어 있는 내용뿐만 아니고, 숨어 있는 내용을 더듬어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짐짓 가리키는 그 반대편도 살필 줄 알아야 한다. ‘도 생명을 지녀야 한다. 숨을 쉬고 있어야 한다. 아니, 펄떡펄떡 살아 움직여야 한다. 이미 죽어 있는 시를 아무리 읽어 보았자, 무슨 감동을 얻을 수 있겠는가.

시운(詩云) “연려비천 어약우연(鳶飛戾天 魚躍于淵).” 이 뜻은 다음과 같다. 시는 말한다. ‘솔개는 치솟아서 하늘에 다다르고 잉어는 연못에서 뛰어오른다.’ 이 글에 시운’(詩云)이라는 말이 붙어 있으니, 이는 시경’(詩經)의 한 시구’(詩句)를 나타낸다고 본다.(시경의 대아 한록편’) 시구에서 역동성을 느끼고, 여기에서 엘랑비탈’(elan vital)을 발견한다. ‘엘랑비탈, 이러한 동적 과정의 내적 충동력을 가리키는 성싶다. , ‘우주의 창조적 진화를 상징한고도 한다. 프랑스어로 엘랑’(elan)도약을 의미하고 비탈’(vital)생명을 뜻한다고 한다. 이게 이른바 생명의 본 모습일 터이다. 사전적 풀이를 보면, ‘엘랑비탈생명 그 자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항상 새로운 자기를 형성해 가는 창조적인 진화라고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