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문

시로써 시를 논하다/ 김 재 황

시조시인 2019. 7. 20. 19:16

(감상문)

 

로써 를 논하다

-이시환 사백의 시집 빈 그릇 속의 메아리를 읽고

 

김 재 황

 

 

깊은 바다 속 풍파를 다 짓눌러 놓고

아니, 아니, 세상 시끄러움을 깔고 앉아서

두 눈을 지그시 내리감고 있는,

靜默治道 난해한 네 글자가 제각각

한 폭의 그림 속 백발의 늙은이 되어

비틀비틀 내게로 다가오네.

-이시환 사백 작품 정묵지도

 

논어 중 선진편5를 본다.

남용 삼복백규, 공자 이기형지자 처지’(南容 三復白圭, 孔子 以其兄之子 妻之). 이는, <‘남용백규의 시를 여러 번 되풀이하여 읊었으므로, 공자는 자기 형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라는 뜻이다. ‘남용은 공자의 제자로 언어를 삼간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공자에게는 맹피라는 몸이 불편한 형이 있는데, 그에게는 딸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면 백규라는 시는 어떤 시인가? 시경 중 대아’() 편으로, ‘周室父老가 젊은 을 경계한 시라고 한다. 그 시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백규지점 상가마야 사언지점 불가위야’(白圭之玷 尙可磨也 斯言之玷 不可爲也). 이는, ‘흰 구슬이 이지러졌다면 오히려 갈아서 바르게 할 수 있지만, 말이란 것이 이지러지면 어찌할 도리가 없다.’라는 뜻이다. 더 설명하여 옥의 티를 가리킨다.

이시환 사백의 시 중 정묵치도말없이 고요히 있는 것으로 길을 다스린다.’라는 뜻이니, 시경 속의 사언지점 불가위야의 뜻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게다가 한 폭의 그림 속 백발의 늙은이 되어를 읽을 때, 어찌 공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하, 그놈 참 매끄럽게 잘도 빠졌구나.

찰찰 윤기 넘치고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그 알갱이들의 전후좌우 뜻들이 모여

비로소 하나의 사상이란 큰 집을 이루었구나.

-이시환 사백 작품 옥수수를 삶아 먹으며

 

논어 중 학이편15를 본다.

<자공왈 빈이무첨 부이무교 하여?” 자왈 가야. 미약빈이락 부이호례자야.” 자공왈 시운여절여차 여탁여마 기사지위여.” 자왈 사야, 시가여언시이의. 고저왕이지래자.”(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子貢曰 詩云如切如磋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子曰 賜也 始可與言詩已矣. 告諸往而知來者.”)>

이는, <자공이 말했다. “가난해도 아첨하지 않고 돈이 많아도 교만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옳다. 허나 가난하면서도 길을 즐기고 돈이 많으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다.” 자공이 말했다. “시에서 절차탁마란 구절은 이것을 두고 한 말이겠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사야, 비로소 함께 시를 논할 만하다. 지난 것을 말하니 앞의 것을 아는구나.”

자공은 공자의 둘째가는 제자이다. 공자를 그를 부를 때 라고 불렀다. 그의 말 중에 여절여차 여탁여마를 줄여서 절차탁마라고 한다. ‘자르는 것이요, ‘줄로 가는 것이요, ‘정으로 쪼는 것이요, ‘숫돌로 가는 것이다. 이 말을 자공은 수양의 과정이 끝이 없음이라고 보았다.

그러면 이 시구는 시경의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는, 시경의 위풍기욱이라는 시에 들어 있는데, 이는 위나라 무공을 찬미한 노래라고 한다. 이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유비군자 여절여차 여탁여마’(有匪君子 如切如磋 如琢如磨). 여기에서 유비군자의 풀이가 문제인데 ’()’()의 가차(假借)라고 한다. 그래서 문채 있는 모양을 가리킨다는데 ’()는 거의 무의미한 조자(助字)로 알려져 있다. 그러면 유비군자는 어떻게 풀이될까? 이는, ‘잘생긴 우리 임금정도가 어떨지 모르겠다.

이시환 사백은, 옥수수 알갱이들의 가지런한 모습을 보고 잘도 빠졌구나!’라고 감탄한다. 이 옥수수 알갱이들이 이처럼 잘생긴 것은 하느님이 자르고 갈고 쪼고 문질렀기때문이다. 자공의 말을 따르면, 옥수수 대의 그 땀나는 노력(절차탁마)이 이렇듯 아름다운 알갱이를 만들어 놓았다는 뜻도 된다. 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네가 보고 싶어 나는 간다.

산간벽지이건만 양지바른 그곳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의 안온함 속으로.

 

네가 그리워 나는 간다.

험한 길이지만 바람타지 않는 그곳에

오손 도손 서로 기대어사는 마을의 평화 속으로.

-이시환 사백 작품 노랑제비꽃 1’

 

논어 중 자한30을 본다.

<‘당체지화 편기번이. 기불이사 실시원이.’ 자왈 미지사야 부하원지유.”(‘唐棣之華 偏其反而. 豈不爾思 室是遠而.’ 子曰 未之思也 夫何遠之有.”)> 이는, <‘아가위나무 꽃이 팔랑거린다. 어찌 네 생각 안 나겠는가마는 집이 멀리 떨어져 있구나!’ (를 읽고 나서) 공자가 말했다. “그는 진정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겠지. 무엇이 멀다고 하겠는가.”>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산앵두나무를 나타낸다. 그러니 당체는 그 비슷한 나무가 아닐까 한다. ‘편기번의에서 으로 읽을 때는 뒤치다를 나타낸다. 그리고 치우치다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편기번이팔랑거리다를 떠올리게 된다. ‘실시원이집이 멀기에 가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공자는 간절히 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아무리 멀더라도 가야 하지 않겠느냐.’라며 혀를 찼을 것 같다. 이 시는 지금 시경에는 없다. 그 당시에는 있었겠지만.

그런데 이시환 사백은 네가 보고 싶어 나는 간다.’라고 단호하게 노래한다. 이 시를 공자께서 읽었더라면 , 그래야지. 보고 싶으면 당장에라도 달려가야지!“라고 하며 무릎을 쳤을 게 확실하다. 그렇다. 이 시야말로, ’일언이펴지 왈사무사‘(一言以蔽之 曰思無邪: 한 마디로 말해서 나타낸 생각에 바르지 않음이 없다)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