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의 악기론

제69절, '악'이란 즐기는 것(역: 녹시 김 재 황)

시조시인 2022. 4. 3. 07:35

제69절 ‘악’이란 즐기는 것

  夫樂者樂也 人情之所不能免也 樂必發於聲音 形於動靜 人之道也 聲音動靜性術之變 盡於此矣 故人不耐無樂 樂不耐無形 形而不爲道 不耐無亂 先王恥其亂 故制雅頌之聲以道之 使其聲足樂而不流 使其文足論而不息 使其曲直繁瘠廉肉節奏 足以感動人之善心而已矣 不使放心邪氣得接焉 是先王立樂之方也(부악자락야 인정지소불능면야 락필발어성음 형어동정 인지도야 성음동정성술지변 진어차의 고인불내무락 락불내무형 형이불위도 불내무란 선왕치기란 고제아송지성이도지 사기성족락이불류 사기문족논이불식 사기곡직번척렴육절주 족이감동인지선심이이의 불사방심사기득접언 시선왕립락지방야).

 무릇 ‘악’(음악)이란 즐기는 것이다. 사람 정의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악’은 반드시 ‘울리는 소리’(노래가 되어)에서 일어나서 움직이고 고요함(춤으로 되어)에 나타난다. 사람의 길인 것이다. ‘성음’(목소리- 노래) ‘동정’(춤) ‘성술’(성정이 사물에 감동되어 발동하는 것) 등의 변화가 이에서 다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즐거움이 없을 수(耐= 能) 없고 즐거움은 드러냄이 없을 수 없다. 드러내면서 길을 삼지 않으면 어지럽지 않을 수 없다. 선왕이 그 어지러워짐을 부끄럽게 여겨서 그 때문에 ‘아’와 ‘송’의 소리를 만들어 이를 이끌었다. 그 소리울림으로 하여금 즐거워하기에 족하나 (방탕으로) 흐르지 않게 하였다. 그 ‘문’(善美함)으로 하여금 토론하기에 족하나 (착함으로 나아감을) 쉬지 않게 하였다. 그 ‘곡직’(성조가 곡절한 것과 성조가 곧고 긴 것) ‘변척’(성조가 떠들썩한 것과 성조가 맑고 깨끗한 것) ‘염육’(성조가 가늘고 날카로운 것과 성조가 굵고 유연한 것) ‘절주’(성조응 그치는 것과 성조를 나아가게 하는 것) 등으로 하여금 사람의 착한 마음을 느껴서 움직이기에 족할 뿐, 방탕한 마음과 사악한 기운이 범접함을 얻지 못하게 했다. 이게 선왕이 세우는 ‘악’의 방도였다. (녹시 역)

 ‘시조’의 경우- <무릇 ‘시조 내용’이란 즐기는 것이다. 사람 정(인정)의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시조 내용’은 반드시 ‘내재율의 음률’(노래가 되어)에서 일어나서 움직이고 고요함(멋으로 되어)에 나타난다. 사람의 길인 것이다. ‘성음’(목소리- 노래) ‘동정’(멋) ‘성술’(성정이 사물에 감동되어 발동하는 것) 등의 변화가 이에서 다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즐거움이 없을 수(耐= 能) 없고 즐거움은 드러냄이 없을 수 없다. 드러내면서 길을 삼지 않으면 어지럽지 않을 수 없다. 옛 시조 작가가 그 어지러워짐을 부끄럽게 여겨서 그 때문에 ‘높이는 시조’와 ‘기리는 시조’의 음률을 만들어 이를 이끌었다. 그 내재율로 하여금 즐거워하기에 족하나 (방탕으로) 흐르지 않게 하였다. 그 ‘문’(善美함)이 토론하기에 족하나 (착함으로 나아감을) 쉬지 않게 하였다. 그 ‘곡직’(어조가 곡절한 것과 어조가 곧고 긴 것) ‘변척’(어조가 떠들썩한 것과 성조가 맑고 깨끗한 것) ‘염육’(어조가 가늘고 날카로운 것과 어조가 굵고 유연한 것) ‘절주’(어조를 그치는 것과 어조를 나아가게 하는 것) 등이 사람의 착한 마음을 느껴서 움직이기에 족할 뿐, 방탕한 마음과 사악한 기운이 범접함을 얻지 못하게 했다. 이게 옛 시조시인이 세우는 ‘시조 내용’의 방도였다.>

[녹시 생각]
 다시 한번 ‘어조’를 생각한다. ‘어조’란 ‘시나 시조의 목소리’를 뜻한다. 그러면 여기에서 내가 지은 시조 2편을 소개하고 그 ‘시조의 목소리’를 짚어 보고자 한다.

(ㄱ)
배꽃이 지는 날은 황톳길을 헤맸을까
날리는 흙먼지 속에 임의 걸음 살려내면
그 두 뺨 붉은 그대로 봉두메에 나와 설까.

달빛이 시린 날은 거문고를 안았으리
다 해진 파도 소리 그 가락에 얹힐 때면
가냘픈 임의 손끝도 마음 줄을 퉁겼으리.
                        -졸시 ‘매창묘 앞에서’ 전문

(ㄴ)
살아서 춥던 숨결 죽어서는 붉게 탄다
진달래 꽃잎마냥 그 입술이 벌어지면
봄 오는 광덕산 기슭 밀물지는 임의 향기.

맑게 흐른 물소리 가는 걸음 붙든 그곳
그리움 쏟아 내듯 새겨놓은 임의 노래
목련꽃 하얀 마음이 팔 저리게 붓을 든다.

바람을 막고 있는 몇 소나무 그 너머로 
무덤 앞 두견새는 그리움을 펼쳤을까
젖은 눈 바라본 하늘에 임의 구름 흘러간다.
-졸시 ‘부용묘를 찾아보고’ 전문

 (ㄱ)은 매창의 묘 앞에서 매창을 생각하며 지은 시조이다. 1573년, 매창은 부안의 현리(縣吏)이던 이탕종(李湯從)의 서녀로 태어났다고 한다. 그녀의 처음 이름은, 계유(癸酉)년에 태어났으므로, 계생(癸生)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자라면서 이름을 바꾸어서 ‘향금’(香今)이라고 했다가 다시 ‘천향’(天香)이라고 했다. 그녀는 재주 있고 영리하였다. 아버지 이탕종이 그녀에게 한학을 가르쳤다고 하는데, 시문을 공부하였고 시를 지었다고 한다. 그녀는 꽃다운 나이에 태수에게 정조를 빼앗겼고, 그 후에 기생이 되었다고 전한다. 기생이 되어서 처음 호는 ‘섬초’(蟾初)였으며, 이름을 다시 ‘계생’(桂生)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처음으로 기생이 되었을 때, 그녀는 기적(妓籍)에 오른 관기(官妓)는 아니었던 모양인데, 어찌어찌하다가 차츰 묶이게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녀는 권번(券番)에 들어갔을 거라고 여겨진다. 그러면서 더욱 시문에 능숙해지고 세련되어 갔을 듯싶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그녀는 당당한 문인들과 어울리게 되었고, 다시 호를 바꾸어서 ‘매창’(梅窓)이라고 했다. 물론, 매창에게는 정인도 있었고 허균이라는 문우도 있었으나, 한 많은 생활을 시로 달래다가 1610년에 3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고 알려져 있다. 들리는 말에, 그녀 자신이 그때(38세 때) 죽은 것으로 가장하고 상경하여 살았으며 적어도 40살은 넘겼다고도 한다. 어쨌든 그녀는 죽은 후에 고향인 부안 땅에 묻혔다. 
 (ㄴ)은, 부용의 묘 앞에서 부용을 떠올리며 지은 시조이다. 1801년, 부용은 평북 성천(成川)에서 태어났다. 성은 김 씨이고 이름이 ‘부용’(芙蓉)이며, 호는 ‘운초’(雲楚)이다. 원래 그녀의 집안은 유학자 집안으로 그 고을에서는 뿌리가 있는 가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기녀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831년, 그녀는 평안도에 유람 중인 연천(淵泉) 김이양(金履陽)을 만나게 됨으로써 그의 소실로 들어갔다. 연천은 안동 김문 출신이며 ‘한성판윤’을 거치고 ‘예조판서’ ‘이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한 사람이다. 당시 그는 3년 전(1828년)에 부인인 완산 이 씨를 잃고 혼자 지내고 있었다. 소실로 들어갔을 때, 그녀의 나이는 30세였고 연천의 나이는 77세였다. 그러나 둘은 사랑하였다. 1832년, 그녀는 연천을 따라서 한양으로 올라온 후에 자연스럽게 ‘연천과 교분이 있었던 유명 문사들’과도 교유하며 그의 시재를 마음껏 발휘하였다. 그 후, 1845년 5월에 연천은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1851년(50세)까지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죽은 후에, 연천 곁에는 안장되지 못하였고, ‘연천의 무덤이 바라보이는 언덕’에 그 무덤이 만들어졌다. 그게 광덕산 기슭이다.
 이 두 작품 (ㄱ)과 (ㄴ)은, 그 내용(주인공)이 ‘모두가 기녀’였고 여류시인이었다는 사실이 같다. 게다가 그 두 여류문인들의 묘 앞에서 지은 작품들이다. 이 두 작품은 그런 동질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도 앞의 (ㄱ)인 작품은 애절한 목소리를 지녔으나, (ㄴ)인 작품은 정감만 가득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이렇듯 다른 목소리들은 내가 의식적으로 낸 게 결코 아니다. 내 안에 ‘나도 모르게 잠재되어 있던 의식의 표현’이었다고 여겨진다. 
 앞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두 여인에게는 아주 다른 면이 있다. (ㄱ)의 매창은 사랑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떠돌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렇기에 내 마음 속에 안타까움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부용은, 비록 나이 많은 사람의 소실이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비교적 행복한 일생을 보냈다. 그러니 그녀에 대하여는 그녀의 여러 작품을 통한 정감이 더욱 클 뿐이다. 앞의 2작품으로 볼 때, 두 사람이 처했던 사정도 다르고 내가 두 무덤을 찾아간 시기도 다르다. 이런 면들이 모두 다른 ‘시조의 목소리들’로 표현되었다. 
 시인이 ‘모든 내용과 모든 독자’에게 하나의 목소리로 시를 쓴다는 것은 무리다. 사실로도 시인은 평생동안 하나의 목소리만을 가지고 시를 쓰지도 않으며 쓸 수도 없다. 시인은 여러 목소리를 지니고 자유롭게 느낌을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