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아니 '멍쯔' 이야기

17. 그때는 그때이고 이때는 이때이다(글: 녹시 김 재 황)

시조시인 2022. 4. 4. 12:26

17. 그때는 그때이고 이때는 이때이다



 맹자가 제(齊)나라를 떠날 때에, 길가에서 제자인 충우(充虞)가 맹자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유쾌하지 않으신 듯이 보입니다. 예전에 제가 선생님께 듣기로는 ‘군자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남을 탓하지도 않는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그때이고 이때는 이때이다. 오백 년에 반드시 천하에 성왕이 나타나고 그동안에는 반드시 이름을 떨치는 사람이 나오기 마련이다. 주(周)나라가 시작된 이래로 칠백여 년이 지났다. 햇수로 따져도 이미 2백 년이나 지났다. 시기로 따져 보면 일어날 만한 때이다. 그러나 저 하늘이 아직도, 어지러운 천하가 잘 다스려지기를 원치 않고 있다. 만일 천하가 태평하게 다스려지기를 바란다면 지금 이 세상에서 나를 버리고 그 누가 있겠는가? 이를 생각하면 내가 어찌 불유쾌한 기색을 지니겠는가?”

 [孟子去齊, 充虞路問曰 ‘̂̂夫子若有不豫色然. 前日虞聞諸夫子曰 <君子不怨天 不尤人>’ 曰 ‘彼一時, 此一時也. 五百年, 必有王者興, 其間必有名世者. 由周而來, 七百有餘歲矣. 以其數則過矣, 以其時考之, 則可矣. 夫天未欲平治天下也, 如欲平治天下, 當今之世, 舍我其誰也? 吾何爲不豫哉?’(맹자거제, 충우노문왈 ‘부자약유불예색연, 전일우문저자부자왈 <군자불원천 불우인>’ 왈 ‘피일시 차일시야. 오백년, 필유왕자흥, 기간필유명세자. 유주이래, 칠백유여세의. 이기수즉과의, 이기시고지, 즉가의. 부천미욕평치천하야, 여욕평치천하, 당금지세, 사아기수야? 오하위불예재?) 4-13]

 맹자와 그 일행은 이렇듯 말을 주고받으며 터벅터벅 걸어서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들이 제(齊) 나라를 떠나서 ‘주’(晝)라는 고을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제(齊) 나라 선왕(宣王)을 위해서 맹자를 제(齊) 나라에 더 머물게 해 보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맹자 앞에 꿇어앉아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맹자는 그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걸상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불쾌하게 여기며 맹자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몸을 깨끗하게 닦은 후에 마음을 가다듬고서 하룻밤을 지낸 다음, 선생님을 찾아와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도 선생님께서는 누워만 계실 뿐, 제 말은 듣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다시 뵙지도 않겠습니다.” 
 “거기 앉으시오. 내가 당신께 잘 설명하리다. 옛날에 ‘자사’(子思, 공자의 손자)를 붙들려고 했던 노(魯) 나라 ‘목공’(穆公)은 자기의 뜻을 받들러 보낸 사람이 ‘자사’의 곁에 없으면, ‘자사’를 편안하게 할 수 없다고 여겼소. 또, ‘설류’(泄柳)나 ‘신상’(申祥) 같은 현인도 자기들의 뜻을 통해 주는 사람이 목공 곁에 없으면 자기들의 몸이 편안해질 수 없다고 여겼소. 그대가 나를 염려하는 것이 ‘목공’이 ‘자사’를 대우하는 것에 미치지 못하오. 그러니 당신이 나를 거절하는 것이겠소? 아니면 내가 당신을 거절하는 것이겠소?”

  [孟子去齊, 宿於晝. 有欲爲王留行者, 坐而言, 不應, 隱几而臥. 客不悅曰 ‘弟子齋宿而後敢言, 夫子臥而不聽. 請勿復敢見矣’ 曰 ‘坐, 我明語子. 昔者魯穆公 無人乎子思之側, 則不能安子思, 泄柳申祥 無人乎穆公之側 則不能安其身. 子爲長者慮 而不及子思. 子絶長者乎? 長者絶子乎?’(맹자거제, 숙어주. 유욕위왕류행자, 좌이언, 불응, 은궤이와. 객불열왈 ‘제자재숙이후감언, 부자와이불청. 청물부감견의’ 왈 ‘좌, 아명어자. 석자노목공 무인호자사지측, 즉불능안자사, 설류신상 무인호목공지측 즉불능안기신. 자위장자려 이불급자사. 자절장자호? 장자절자호?) 4-11]

 앞의 ‘은궤이와’(隱几而臥)에서 ‘은’은 ‘기대는 것’을 말하고 ‘궤’는 ‘앉아서 편안히 기댈 수 있는 팔걸이’를 말합니다. 팔걸이에 팔을 얹고 편안하게 의자에 기대어 있는 모습이 연상됩니다. 그리고 여기에 또 ‘설류’(泄柳)라는 사람이 등장하는군요. 이 사람은 춘추시대 때에 살았던 노(魯) 나라의 어진 선비라고 합니다. 어렸을 적의 이름이 ‘설류’이고 어른이 되고 나서의 이름은 ‘자류’(子柳)라고 한답니다. 노(魯) 나라 목공(穆公)이 그를 찾아가서 만나려고 하였으나, 그는 문을 닫고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신상’(申詳)도 노(魯) 나라의 현자랍니다. 들리는 말에, ‘신상’은 공자의 제자인 ‘자장’(子張)의 아들이라고도 합니다.
 또 다음 날, 맹자와 그 일행은 길을 걸어서 ‘휴’(休)라는 땅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여러 제자 중에서 공손추(公孫丑)가 맹자에게 물었습니다.
 “벼슬을 하면서 녹봉을 받지 않는 것이 옛사람의 도리였습니까?”
 “아니다. 내가 ‘숭’(崇) 지방에서 제(齊) 나라 임금을 만나고 나오면서부터, 나는 제(齊) 나라를 떠날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객경(客卿)이란 벼슬에 있는 동안에도 떠나려는 그 생각을 변치 않으려고 녹봉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제(齊) 나라에 잇달아서 군대를 동원하는 명령이 내렸으므로, 벼슬을 그만두겠다고 청할 수가 없었다. 제 나라에 오래 머문 것은 내 뜻이 아니었다.”

 孟子去齊, 居休, 公孫丑問曰 ‘仕而不受祿 古之道乎?’ 曰 ‘非也. 於崇, 吾得見王, 退而有去志, 不欲變, 故不受也. 繼而有師命, 不可以請. 久於齊, 非我志也.’(맹자거제, 거휴, 공손추문왈 ‘사이불수록 고지도호?’ 왈 ‘비야. 어숭, 오득견왕, 퇴이유거지, 불욕변, 고불수야. 계이유사명, 불가이청. 구어제, 비아지야.) 4-14]

 이 이야기는 좀 혼동이 옵니다. 맹자는 선왕(宣王)에 대하여는 호의적이었지요. 그래서 객경(客卿)이라는 벼슬자리에 앉았지요. 그런데 그 전부터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요? 아마도 이 날은 섭섭한 마음이 도에 지나쳐서 이런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맹자가 제(齊) 나라를 떠난 뒤에, 제(齊) 나라 사람인 ‘윤사’(尹士)가 다른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맹자가 처음부터 우리 왕께서 탕왕(湯王)이나 무왕(武王)처럼 되실 수 없다는 것을 몰랐다면, 이는 현명하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다. 또, 그렇게 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 왕을 찾아왔다면, 그가 녹봉을 탐내서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천 리를 멀다고 하지 않고서 우리 왕을 만나러 왔다가, 자기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떠났다. 그런데 ‘주’(晝) 고을에서 사흘 밤이나 묵고 난 뒤에 갔으니, 어찌 그리 주춤거렸는가? 나는 이게 못마땅하다.”
 맹자의 제자인 ‘고자’(高子)가 이 말을 맹자에게 전했습니다. 그러자, 맹자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윤사가 어찌 내 마음을 알겠는가? 천리 길을 멀다 않고 찾아가서 왕을 만난 것은 내가 바랐던 일이다. 그러나 내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제(齊) 나라를 떠난 게 어찌 내가 원한 바이겠는가? 나의 부득이한 일이었다. 또, 내가 ‘주’ 고을에서 사흘이나 묵고 떠났다지만, 내 마음에는 오히려 좀 빠르지 않았는가 여겨진다. 나는 왕이 마음을 고치길 바랐는데, 만약 왕이 마음을 고쳤다면 반드시 나를 다시 돌아오라고 불렀을 거다. 그러나 내가 ‘주’ 고을을 떠나도, 왕이 나를 쫓아오지 않았다. 그러니, 내 그때에서야 아무 거리낌 없이 돌아갈 뜻을 갖게 되었다. 비록 그렇더라도 내가 어찌 왕을 저버리겠는가. 왕은 아직도 선정을 베풀 만한 능력이 있다. 왕이 만약에 나를 쓴다면야 어찌 제나라 백성들만 편안해지겠는가? 천하의 백성이 편안해지리니, 왕이 혹시나 마음 고치기를 나는 날마다 바라고 있었다. 내가 어찌 그런 소인배들처럼 행동하겠는가? 자기 임금에게 간하다가 자기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발끈 노한 빛을 그 얼굴에 나타내겠으며, 또 떠난다고 하더라도 온종일 있는 힘을 다하여 멀리 해가 다할 때까지 가서 묵는 그러한 박정한 짓을 하겠는가?”
 ‘윤사’가 맹자의 그 말을 전해 듣고 말했습니다.
 “나는 참으로 소인이로구나.”

 [孟子去齊, 尹士語人曰 ‘不識王之不可以爲湯武, 則是不明也. 識其不可, 然且至, 則是干澤也. 千里而見王, 不遇故去, 三宿而後出晝, 是何濡滯也. 士則玆不悅’ 高子以告, 曰 ‘夫尹士惡知予哉? 千里而見王 是予所欲也, 不遇故去 豈予所欲哉? 予不得已也. 予三宿而出晝, 於予心猶以爲速. 王庶幾改之 王如改諸 則必反予. 夫出晝而王不予追也, 予然後浩然有歸志. 予雖然豈舍王哉. 王由足用爲善. 王如用予, 則豈徒齊民安? 天下之民擧安. 王庶幾改之 予日望之. 予豈若是小丈夫然哉? 諫於其君而不受, 則怒, 悻悻然見於其面 去則窮日之力而後宿哉?’ 尹士聞之曰 ‘士誠小人也’(맹자거제, 윤사어인왈 ‘불식왕지불가이위탕무, 즉시불명야. 식기불가, 연차지, 즉시간택야. 천리이견왕 불우고거, 삼숙이후출주, 시하유체야. 사즉자불열’ 고자이고, 왈 ‘부윤사오지여재? 천리이견왕 시여소욕야. 불우고거 기여소욕재? 여부득이야. 여삼숙이출주, 어여심유이위속. 왕서기개지 왕여개저 즉필반여. 부출주이왕불여추야, 여연후호연유귀지. 여수연기사왕재. 왕유족용위선. 왕여용여, 즉기도제민안? 천하지민거안. 왕서기개지 여일망지. 여기약시소장부연재? 간어기군이불수, 즉노, 행행연현어기면 거즉궁일지력이후숙재?’ 윤사문지왈 ‘사성소인야’) 4-12]

 앞의 ‘행행연현어기면’(悻悻然見於其面)에서 ‘행행연’은 ‘노한 기운이 나타난 모양’을 이릅니다. ‘행’(悻)은 ‘발끈 성을 내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그리고 ‘거즉궁일지력이후숙재’(去則窮日之力而後宿哉)에서 ‘궁일지력’은 ‘하루의 힘을 다함’이라는 뜻입니다. 즉, 해가 뜰 때에서 해기 질 때까지 ‘하루의 시간을 최대한으로 이용해서’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맹자는 돌아오는 중에 송(宋) 나라에서 여러 날을 묵었던 모양입니다. 해가 바뀌어서 맹자는 60살이 되었습니다. 기원전 313년이었다고 합니다. 송(宋)  나라의 ‘석구’(石丘)라는 땅에서 맹자는, 송(宋)나라에서 초(楚) 나라로 가는 ‘송경’(宋牼)이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송경’은 ‘송견’(宋鈃) 또는 ‘송영자’(宋榮子)라고도 불립니다. 송경은 묵가(墨家)의 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맹자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맹자는 그를 ‘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 맹자가 송경(宋牼)에게 물었습니다.
 “선생께선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나는, 진(秦) 나라와 초(楚) 나라가 전쟁을 준비한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초 나라 왕을 만나서 말을 잘하여 싸움을 그만두게 하려고 합니다. 만약에 초 나라 왕이 내 의견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진나라 왕을 만나서 말을 잘하여 그만두게 하려고 합니다. 초 나라 왕과 진나라 왕 중에 내 뜻을 받아들여 줄 분이 있을 터이지요.”

 [宋牼將至楚, 孟子遇於石丘. 曰 ‘先生將何之?’ 曰 ‘吾聞秦楚搆兵, 我將見楚王, 說而罷之. 楚王不悅, 我將見秦王 說而罷之. .二王我將有所遇焉’(송경장지초, 맹자우어석구. 왈 ‘선생장하지?’ 왈 ‘오문진초구병, 아장견초왕, 세이파지. 초왕불열, 아장견진왕 세이파지. 이왕아장유소우언’) 12-4]

 “선생께 저는 자세한 얘기를 묻지 않겠습니다. 그 가장 중요한 뜻만 듣고 싶습니다. 그 왕들을 어떻게 설득하시려는지요?”
 “나는 그 싸움이 서로에게 이롭지 않다는 점을 말하려고 합니다.”
 “선생의 뜻은 크지만, 선생이 내세우는 말은 옳지 못합니다. 선생이 이로움을 가지고 진(秦) 나라 왕과 초(楚) 나라 왕을 설득한다면, 진(秦) 나라 왕과 초(楚) 나라 왕이 이로움을 좋아하여 당장은 삼군(三軍)의 군대를 물리겠지요. 이는, 삼군의 군사들이 물리는 것을 좋아하고 이로움을 좋아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남의 신하가 된 사람이 이로움을 생각하여 자기 임금을 섬기고, 남의 자식이 된 사람이 이로움을 생각하여 자기 아비를 섬기며, 남의 동생이 된 사람이 이로움을 생각하여 자기 형을 섬기게 될 터이지요. 그렇게 되면 임금과 신하, 아비와 아들, 형과 아우 사이에서도 마침내 ‘인’(仁)과 ‘의’(義)을 내버리고 이로움을 생각해서 서로 만나게 될 겁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망하지 않은 나라는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생께서 ‘인’(仁)과 ‘의’(義)를 가지고 진(秦) 나라 왕과 초(楚) 나라 왕을 설득한다면, 진(秦) 나라 왕과 초(楚) 나라 왕이 ‘인’(仁)과 ‘의’(義)를 좋아하게 되어 삼군의 군대를 물리게 될 겁니다. 이는 삼군의 군사들이 물림을 즐거워하고 ‘인’(仁)과 ‘의’(義)를 좋아하는 것이 됩니다. 남의 신하가 된 사람이 ‘인’(仁)과 ‘의’(義)를 생각하여 자기 임금을 섬기고, 남의 자식이 된 사람이 ‘인’(仁)과 ‘의’(義)를 생각하여 자기 아비를 섬기며, 남의 동생이 된 사람이 ‘인’(仁)과 ‘의’(義)를 생각하여 자기 형을 섬기게 될 터이지요. 그렇게 되면 임금과 신하, 아비와 아들, 형과 아우 사이에서도 이익을 내버리고 ‘인’(仁)과 ‘의’(義)만을 생각하며 서로 대하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고서도 ‘왕 노릇’을 하지 못한 사람은 지금껏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로움을 들어서 말하겠다고 하십니까?”

 [曰 ‘軻也, 請無問其詳, 願聞其指, 說之將如何?’ 曰 ‘我將言其不利也’ 曰 ‘先生之志則大矣 先生之號則不可. 先生以利說秦楚之王, 秦楚之王悅於利以罷三軍之師, 是三軍之士樂罷而悅於利也. 爲人臣者懷利以事其君, 爲人子者懷利以事其父, 爲人弟者懷利以事其兄, 是君臣父子兄弟終去仁義, 懷利以相接, 然而不亡者 未之有也. 先生以仁義, 說秦楚之王, 秦楚之王, 悅於仁義, 而罷三軍之師, 是三軍之士, 樂罷而悅於仁義也. 爲人臣者, 懷仁義以事其君, 爲人子者, 懷仁義以事其父, 爲人弟者, 懷仁義以事其兄, 是君臣父子兄弟, 去利懷仁義以相接也, 然而不王子, 未之有也, 何必曰利?’(왈 ‘가야, 청무문기상, 원문기지, 세지장여하?’ 왈 ‘아장언기불리야’ 왈 ‘선생지지즉대의 선생지호즉불가. 선생이리세진초지왕, 진초지왕열어리이파삼군지사, 시삼군지사낙파이열어리야. 위인신자회리이사기군, 위인자자회리이사기부, 위인제자회리이사기형, 시군신부자형제종거인의, 회리이상접, 연이불망자 미지유야. 선생이인의, 세진초지왕, 진초지왕, 열어인의, 이파삼군지사, 시삼군지사, 낙파이열어인의야. 위인신자, 회인의이사기군, 위인자자, 회인의이사기부, 위인제자, 회인의이사기형, 시군신부자형제, 거리회인의이상접야, 연이불왕자, 미지유야, 하필왈리?’) 12-4]

 이 맹자의 말은 참으로 명쾌합니다. 이는, 맹자가 일찍이 양혜왕(梁惠王, 실제로는 ‘위’魏 나라 혜왕)에게도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익만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이 혼란스럽게 됩니다. 그렇기에 맹자는, ‘인’(仁)과 ‘의’(義)를 무겁게 여기지 않는, ‘묵자’(墨子)는 물론이려니와, ‘양자’(楊子)도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맹자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양자는 ‘나를 위한다.’(爲我說 위아설)라고 주장하니, 머리털 하나를 뽑아서 천하를 이롭게 한다 해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묵자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한다.’(兼愛說 겸애설)라고 주장하니, 머리 꼭대기에서 발뒤꿈치까지 갈아서 없어져도 천하 사람들을 이롭게 하려고 애썼다. ‘자막’(子莫)은 그 둘의 중도를 취했다(執中). 중도를 취한 것은 정도(正道 바른길)에 가깝다고 하겠지만, 중도만을 고집하느라고 *임기응변(臨機應變, 그때그때 그 시기에 임하여 적당히 일을 처리함)이 없으면 한 가지를 고집하는 바와 같다. 한쪽만을 고집하는 자를 미워하는 까닭은 그가 정도를 해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하나만을 내세우고 백 가지를 못 쓰게 만들기 때문이다.”

 [孟子曰 ‘楊子 取爲我 拔一毛而利天下 不爲也. 墨子 兼愛 摩頂放踵 利天下 爲之. 子莫執中, 執中爲近之, 執中無權, 猶執一也. 所惡執一者, 爲其賊道也, 擧一而廢百也(맹자왈 ’양자 취의아, 발일모이리천하, 불위야, 묵자겸애, 마정방종이천하, 위지. 자막집중, 집중이근지, 유집일야. 소오집일자, 위기적도야, 거일이폐백야)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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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 등장하는 ‘자막’(子莫)은 ‘노(魯) 나라의 현인’이라고 합니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다른 곳에도 나옵니다. 그 이야기를 더해 보겠습니다. 맹자가 말했습니다.
 “양주(楊朱, 또는 양자)와 묵적(墨翟, 또는 묵자)의 말이 천하에 가득 퍼져서 천하 사람들의 주장이나 이론이 양주가 아니면 묵적에게 귀속되고 있다. 양자(楊子, 또는 楊朱)는 ‘나 하나만을 위하자’라는 생각이니, 결국은 임금도 무시하게 된다. 묵자(墨子, 또는 墨翟)는 ‘모두 똑같이 사랑하자’라는 생각이니, 결국은 아버지도 무시하게 된다. 이처럼 아버지도 무시하고 임금도 무시하는 자들은 바로 새나 짐승과 같다. 양자와 묵자의 도가 그치지 않으면 공자의 도가 드러나지 않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사악한 학설이 백성들을 속여서 ‘인’(仁, 어짊)과 ‘의’(義, 옳음)의 길을 가로막게 된다.”

 [‘楊朱墨翟之言盈天下 天下之言 不歸楊則歸墨. 楊氏爲我, 是無君也. 墨氏兼愛, 是無父也 無父無君 是禽獸也. 楊墨之道 不息, 孔子之道 不著, 是邪說誣民 充塞仁義也’(‘양주묵적지언영천하 천하지언 불귀양즉귀묵. 양씨위아, 시무군야. 묵씨겸애 시무부야, 무부무군 시금수야. 양묵지도 불식, 공자지도 부저, 시사설무민 충색인의야’) 6-9]

 ‘충우’라는 사람이 맹자에게 “‘군자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남을 탓하지도 않는다.’라고 들었습니다.”라고 말하자, 맹자는 “그때는 그때이고 이때는 이때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하늘이 태평한 시대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를 버려두고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왜 그렇지 않겠습니까? 누구든지 자신이 세상에서 크게 쓰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솔직한 심정이지만, 나 역시 그렇습니다. 사막과 같은 시인의 고된 길을 걸으며 언젠가는 큰 뜻을 펼칠 수 있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돌덩이가 부서져서 한껏 고움을 이뤘나,
 정녕 그 단단함이 저리 부드럽게 됐나,
 풍화의 긴 손놀림을 내 눈으로 확인한다.

 바람이 크게 불면 눈앞에 생기는 언덕
 나 혼자 오르기는 엄두가 너무 안 나고
 걸음이 어려운 만큼 신기루는 쉽게 뜬다.

 목마른 이곳에도 푸른 목숨이 사느니
 스스로 가시 뽑아 영혼을 깨운 사보텐
 불같은 그 뜨거움으로 꽃이 핀다 오늘은.
                 -졸시 ‘사막을 걸으며’

 때를 기다리는 일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늘을 거칠 것이 없이 날아다니는 ‘용’(龍)도 때를 만나지 못하면 작은 우물 속으로 들어가서 그 몸을 웅크리고 있다고 합니다. 하물며 아무 힘도 지니지 못한 사람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때를 만나지 못하면 어떻습니까? 때를 만나면 세상을 위하여 큰일을 하고, 때를 만나지 못하면 그저 묵묵히 시인의 길을 걸어가면 될 뿐입니다. 결코 이름을 날리지 못한 삶이라고 하여도 무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름을 널리 알리지 않고 깨끗하게 일생을 보낸 선비가 보석 같은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글: 김 재 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