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저들이 부를 내세우면 나는 인으로 대하겠다
그 후, 맹자는 태어난 곳인 추(鄒) 나라로 돌아와서 본격적으로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모든 힘을 쏟았습니다. 그 당시에 맹자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화살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해서 어찌 갑옷을 만드는 사람보다 어질지 못하겠느냐? 다만, 화살을 만드는 사람은 오직 사람을 상하지 못할까 걱정하고, 갑옷 만드는 사람은 오직 사람을 상할까 걱정한다. 굿을 하는 무당과 관을 짜는 목수가 또한 그렇다. 그러므로 직업을 선택할 때는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공자께서도 ‘인자한 고장에 사는 게 좋다. 사는 데를 가려서 인자한 마을에 살지 않으면 어찌 지혜롭다고 하겠느냐?’라고 하셨다. 어짊은 하늘의 존귀한 벼슬이요, 사람의 편안한 집이다. 아무도 막는 이가 없는 데도, 인자하게 살지 않으니, 이는 지혜롭지 못하다. 인자하지도 못하고 지혜롭지도 못하며 예절이 없고 의리가 없으면 남에게 부림을 받게 된다. 남에게 부림을 받으면서 부림을 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활 만드는 사람이 ‘활 만들기’를 부끄러워하고 화살 만드는 사람이 ‘화살 만들기’를 부끄러워하는 것과 같다. 만약에 남에게 부림을 받는다는 사실이 부끄럽다면, 인자함을 행하는 것이 가장 좋다. 인자한 사람은 마치 활을 쏘는 사람과 같다. 활을 쏘는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을 바로잡고 난 뒤에 쏜다. 쏘아서 과녁에 맞지 않아도, 이긴 상대방을 원망하지 않는다. 돌이켜서 실수한 자기 자신을 반성할 따름이다.”
[孟子曰 ‘矢人豈不仁於函人哉? 矢人惟恐不傷人, 函人惟恐傷人. 巫匠亦然. 故術不可不愼也. 孔子曰 <里仁爲美 擇不處仁, 焉得智?> 夫仁, 天之尊爵也 人之安宅也. 莫之禦而不仁, 是不智也. 不仁不智, 無禮無義, 人役也. 人役而恥爲役, 由弓人而恥爲弓, 矢人而恥爲矢也. 如恥之, 莫如爲仁. 仁者如射, 射者正己而後發, 發而不中 不怨勝己者, 反求諸己而已矣’(맹자왈 ‘시인기불인어함인재? 시인유공불상인, 함인유공상인. 무장역연. 고술불가불신야. 공자왈 <이인위미, 택불처인, 언득지?> 부인, 천지존작야 인지안택야. 막지어이불인 시부지야. 불인부지, 무례무의, 인역야. 인역이치위역, 유궁인이치위궁, 시인이치위시야. 여치지, 막여위인. 인자여사. 사자정기이후발, 발이부중 불원승기자, 반구저기이이의’) 3-7]
앞의 ‘함인유공상인’(函人惟恐傷人)에서 ‘함인’은 ‘갑옷 만드는 사람’을 이릅니다. 여기에서 ‘함’은 ‘갑’(甲)과 같은 뜻으로 ‘갑옷’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천지존작’(天之尊爵)은 ‘인자’(仁者)에게는 누구나 존경을 표하기 때문에 ‘인’(仁)을 하늘이 내린 ‘존귀한 벼슬’이라고 한답니다. 여기에서 ‘작’은 ‘참새 모양의 의식용 술잔’을 본뜬 글자인데 임금이 작위를 내릴 때 이런 술잔으로 술을 하사한 데서 ‘벼슬’을 나타내게 되었답니다.
맹자는 또 이런 말도 제자들에게 했습니다.
“불효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자식이 없어서 집안의 대가 끊기는 것이 가장 큰 불효이다. ‘순 임금’이 부모에게 알리지 않고 ‘요 임금’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인 까닭은 뒤를 이를 자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세의 군자들은 순임금이 부모에게 알린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맹자왈 ‘不孝有三, 無後爲大. 舜不告而娶 爲無後也, 君子, 以爲猶告也.’(불효유삼, 무후위대. 순불고이취 위무후야. 군자, 이위유고야) 7-26]
자, 그렇다면 맹자는 자기 집안의 대를 잇는 아들이 있었을까요? 여러 기록을 살펴보아도 그의 아들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지요.
맹자가 제(齊) 나라에 있을 때의 일이었답니다. 맹자가 제나라 임금인 ‘선왕’(宣王)을 만나러 가려고 하던 차에, 왕이 보낸 사람이 와서 말을 전했습니다.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과인이 가서 만나야 하겠지만, 마침 감기에 걸려서 바람을 쐴 수가 없습니다. 아침에 조회하려고 하니, 과인이 만나 뵐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셨습니다.”
맹자가 대답하였습니다.
“이렇게 전해 주십시오. ‘불행히 저도 병이 나서 조정에 나갈 수가 없겠습니다.’라고요.”
[孟子將朝王, 王使人來曰 ‘寡人如就見者也, 有寒疾, 不可以風. 朝將視朝, 不識, 可使寡人得見乎?’ 對曰 ‘不幸而有疾 不能造朝’(맹자장조왕, 왕사인래왈 ‘과인여취견자야, 유한질, 불가이풍. 조장시조, 불식, 가사과인득견호?’ 대왈 ‘불행이유질 불능조조’) 4-2]
이튿날, 맹자가 동곽씨(東郭氏)를 문상하러 나가는데, 공손추(公孫丑)가 맹자에게 물었습니다.
“어제는 병이 나셨다고 나가는 것을 사절하셨다가, 오늘은 조상하러 나가신다니, 혹시 안 되는 일이 아닙니까?”
“어제는 앓다가 오늘은 나았으니, 왜 조상을 가지 않겠나?”
[明日, 出弔於東郭氏, 公孫丑曰 ‘昔者辭以病, 今日弔或者不可乎?’ 曰 ‘昔者疾, 今日愈, 如之何不弔?’(명일, 출조어동곽씨, 공손추왈 ‘석자사이병, 금일조혹자불가호?’ 왈 ‘석자질, 금일유, 여지하부조?’ 4-2]
맹자가 외출하고 나자, 왕이 사람을 시켜서 맹자의 병문안을 하고 의원도 보내었습니다. 집에 있던 ‘맹중자’(孟仲子)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제 들어오라는 왕명이 전해졌지만, 병이 나서 조회에 나가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병이 조금 나아서 조회에 달려갔는데 당도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는 몇 사람을 시켜서 길목을 지키다가 맹자에게 ‘집으로 돌아오지 마시고 조정으로 꼭 가십시오.’라고 이르게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맹자는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어서 경추씨(景丑氏)의 집으로 가서 머물렀습니다. 그러자 경추씨가 맹자에게 말했습니다.
“안에는 아버지와 아들, 밖에는 임금과 신하, 이것이 인간의 커다란 윤리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은혜’를 위주로 하고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공경’을 위주로 합니다. 저는 왕이 선생을 공경하는 것은 보았습니다만, 선생께서 왕을 공경하는 것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王使人問疾, 醫來, 孟仲子對曰 ‘昔者有王命 有采薪之憂, 不能造朝. 今病少愈, 趨造於朝, 我不識能至否乎’ 使數人要於路, 曰 ‘請必無歸 而造於朝’ 不得已而之景丑氏宿焉. 景子曰 ‘內則父子, 外則君臣, 人之大倫也. 父子主恩, 君臣主敬, 丑見王之敬子也, 未見所以敬王也’(왕사인문질, 의래, 맹중자대왈 ‘석자유왕명 유채신지우, 불능조조. 금병소유, 추조어조, 아불식능지부호’ 사수인요어로, 왈 ‘청필무귀 이조어조’ 부득이이지경추씨숙언. 경자왈 ‘내즉부자, 외즉군신, 인지대륜야. 부자주은, 군신주경, 추견왕지경자야 미견소이경왕야’) 4-2]
“허, 그게 무슨 말이오. 제(齊) 나라 사람들 가운데 ‘인’(仁)과 ‘의’(義)에 대하여 왕에게 말하는 자가 없는데, 그게 어찌 ‘인’(仁)과 ‘의’(義)가 좋지 않다고 여겨서 그러겠소? 그들이 마음속으로 ‘이런 임금하고야 어찌 인과 의를 말하겠나!’라고 해서 그러는 거라오. 그렇다면 이보다 더 큰 불경이 어디 있겠소. 나는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의 도(道)가 아니면 절대로 왕 앞에서 말하는 법이 없소. 그러니 제 나라 사람들 가운데 나만큼 왕을 공경하는 이도 없을 거요.”
“아닙니다. 내가 말한 ‘불경’(不敬)이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선생이 본래 임금을 뵈러 가다가 왕명을 듣고는 도리어 가지 않았으니, 저 ‘예기’(禮記)의 가르침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어찌 그런 뜻이겠소? 증자(曾子)가 이런 말을 했소. ‘진(晋) 나라와 초(楚) 나라의 넉넉함(富)을 따라갈 수가 없지만, 저들이 그 넉넉함을 내세우면 나는 나의 어짊으로써 대하겠다. 또 저들이 그 벼슬을 내세우면, 나는 나의 옳음으로써 대하겠다. 내가 어찌 딸리겠느냐?’ 그러니 어찌 의롭지 않은 말을 증자께서 하였겠소? 이것도 하나의 길이 될 거요.”
[曰 ‘惡! 是何言也. 齊人無以仁義與王言者, 豈以仁義爲不美也? 其心曰 <是何足與言仁義也云爾!> 則不敬莫大乎是. 我非堯舜之道, 不敢以陳於王前, 故齊人莫如我敬王也’ 景子曰 ‘否, 非此之謂也. 固將朝也, 聞王命而遂不果, 宜與夫禮, 若不相似然’ 曰 ‘豈謂是與? 曾子曰 <晉楚之富, 不可及也, 彼以其富, 我以吾仁, 彼以其爵, 我以吾義. 吾何慊乎哉?> 夫豈不義而曾子言之? 是或一道也.’(왈 ‘오! 시하언야. 제인무이인의여왕언자, 기이인의위불미야? 기심왈 <시하족여언인의야운이!> 즉불경막대호시. 아비요순지도, 불감이진어왕전, 고제인막여아경왕야’ 경자왈 ‘부, 비차지위야. 고장조야, 문왕명이수불과, 의여부례, 약불상사연’ 왈 ‘기위시여? 증자왈 <진초지부, 불가급야, 피이기부, 아이오인, 피이기작, 아이오의. 오하겸호재?> 부기불의이증자언지? 시혹일도야.’) 4-2]
맹자의 말은 더 이어지지만, 여기에서 끊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맹중자’(孟仲子)가 등장하지요? 어느 기록에는, 이 ‘맹중자’가 바로 맹자의 아들이고 이름이 ‘역’(睪)이라고 씌어 있습니다. 그 글은 잘못되었다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중자’(仲子)는 ‘둘째’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맹자에게는 이 ‘중자’ 말고 ‘큰아들’(伯子)이 또 있어야 하지요. 그런가 하면, 어떤 이는 이 ‘맹중자’가 맹자의 친동생이라고도 합니다. 그 말도 잘못되었다고 생각됩니다. 맹자의 아버지는 맹자가 아주 어렸을 적에 세상을 떠났지요. 동생이 있다고 하면 함께 놀며 자랐을 터입니다. 그렇게 보면, 아무래도 ‘맹중자’는 맹자의 사촌 동생이라는 말이 가장 옳을 성싶습니다. 그래도 의문은 또 남습니다. 사촌 동생이 맹자의 집에는 왜 머물고 있었으며 손님까지 맞았을까요? 맹자에게 배우고 있었기 때문일까요? 아무리 그렇더라도, 왕이 보낸 손님을 맞을 정도라고는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어쩌면 이 ‘맹중자’는 맹자의 양아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양아들’이라면 ‘첫째’보다 ‘둘째’가 더 적당하겠지요.
아무튼 맹자에게는 아들이 있기는 있었던 듯싶습니다. 맹자의 무덤 옆에 ‘맹부’(孟府)라고 불리는 ‘맹자 자손이 거처하던 곳’이 있답니다. 다시 말해서 맹자의 자손들이 거처하는 ‘맹부’와 맹자를 기리는 사당인 ‘맹묘’(孟廟)는, 도시 남쪽에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답니다. 그리고 맹자는 자식의 교육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아주 자세히 이야기했습니다. 만약에 그에게 자식이 없었다면 대충 이야기했겠지요.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제자인 공손추(公孫丑)가 맹자에게 물었습니다.
“군자가 자기 아들을 직접 가르치지 않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사정이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쪽은 반드시 올바른 도리를 가르쳐 주지만, 배우는 아들 쪽에서 올바른 도리를 행하지 못하면 이어서 화를 내게 된다. 올바른 도리를 가르치고 나서 이어 화를 내게 되면, 도리어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해치게 된다. ‘아버지가 나에게 올바른 도리를 가르쳤지만, 아버지 자신이 화내는 것은 올바른 도리에서 나온 게 아니다.’라고 아들이 생각할 것이니, 이렇게 되면 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정리(情理, 인정과 도리)가 상하게 된다. 아버지와 아들 사아의 정리가 상하게 되면 나쁘다. 옛날에는 서로 자식을 바꾸어서 가르쳤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잘하라고 책망하지 않는 법이다. 잘하라고 책망하면 서로 사이가 멀어진다. 사이가 멀어지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은 없다.”
[公孫丑曰 ‘君子之不敎子, 何也?’ 孟子曰 ‘勢不行也. 敎者 必以正 以正不行 繼之以怒. 繼之以怒, 則反夷矣. <夫子 敎我以正 夫子 未出於正也,> 則是父子相夷也..父子相夷則惡矣. 古者易子而敎之, 父子之間不責善, 責善則離, 離則不祥莫大焉’(공손추왈 ‘군자지불교자, 하야?’ 맹자왈 ‘세불행야. 교자 필이정 이정불행 계지이노. 계지이노 즉반이의. <부자 교아이정 부자 미출어정야> 즉시부자상이야. 부자상이즉악의. 고자역자이교지. 부자지간불책선, 책선즉리, 이즉불상 막대언’) 7-18]
어느 때인가, 묵자(墨者)의 주장을 따르는 ‘이지’(夷之)라는 사람이 맹자의 제자인 ‘서벽’(徐辟)을 통하여 맹자를 만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맹자가 이렇게 말했지요.
“나도 전부터 만나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몸이 불편하다. 몸이 나으면 내가 찾아가서 만나겠다. 그러니 이지에게 올 것 없다고 해라.”
뒷날, ‘이지’가 또 맹자를 만나려고 했습니다. 맹자가 제자인 ‘서벽’에게 말했습니다.
“지금은 만날 수 있다. 그에게 곧게 말하지 않으면, 우리의 길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곧게 말하겠다. 내가 들으니, ‘이지’라는 선생(夷子)은 묵자(墨者)의 신봉자라고 하던데 묵자의 경우에는 어버이의 치상(治喪, 초상을 치름)을 박하게 하는 것으로 ‘바른길’(正道)을 삼고 있다더군. ‘이지’는 묵가의 사상으로 천하의 풍속을 바꾸려고 하는데, 어찌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여 귀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지’는 그 어버이를 후하게 장사지냈으니, 이는 천하게 여기는 것으로 어버이를 섬긴 셈이다.”
제자 ‘서벽’이 맹자의 이 말을 ‘이지’(원문에서는 夷子)에게 전하자, 이지가 말했습니다.
“유자(儒者)의 길에, ‘옛 성현들이 백성 다스리기를 마치 어린아이 보살피듯 한다.’라고 하던데,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 말이 바로 ‘사랑에는 차등이 없고 사랑으로 베풀 때는 자기 어버이로부터 시작하라.’라는 말이겠지요.”
서벽(徐辟)이 이 말을 맹자에게 전하자, 맹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지’는 참으로 ‘사람들이 자기 형의 아들 사랑하기를 자기 이웃집 아들 사랑하듯 한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냐? 그 말은 다른 뜻으로 새겨들어야 한다. 어린아이가 기어서 우물로 빠지려고 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죄가 아니다. 또 하늘이 만물을 낼 때는 한 뿌리에서 나오게 했는데, ‘이지’는 두 뿌리에서 나왔다고 여긴다. 아주 옛날에, 죽은 부모를 매장하지 않는 자가 있었다. 그래서 자기 부모가 죽으면 산구덩이에 버렸다. 뒷날에 그가 그곳을 지나가다가 보니, 여우와 너구리가 그 시체를 뜯어먹고 파리와 모기가 모여들어 빨아먹고 있었다. 그는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면서 눈길을 옆으로 돌렸다. 차마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식은땀은 남 때문에 흘린 게 아니라, 속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얼굴에 나타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집으로 간 후에 ‘삼태기와 가래’를 가지고 와서 아버지의 시체를 흙으로 덮었다. 그가 흙으로 덮어 묻은 행위가 참으로 옳았다면, 효자와 어진 사람이 자기 부모를 땅에 묻는 데도 법도가 있지 않겠느냐?”
서벽이 이 말을 ‘이지’에게 전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이지’는 한참이나 멍하니 있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가르침을 잘 받았습니다.”
[墨者夷之, 因徐辟而求見孟子. 孟子曰 ‘吾固願見, 今吾尙病, 病愈, 我且往見’ 夷子不來. 他日, 又求見孟子, 孟子曰 ‘吾今則可以見矣. 不直, 則道不見, 我且直之. 吾聞夷子墨者. 墨之治喪也, 以薄爲其道也. 夷子思以易天下 豈以爲非是以不貴也? 然而夷子葬其親厚, 則是以所賤事親也’ 徐子以告夷子, 夷子曰 ‘儒者之道, 古之人, 若保赤子, 此言何謂也? 之則以爲愛無差等, 施由親始’ 徐子以告孟子, 孟子曰 ‘夫夷子, 信以爲人之親其兄之子, 爲若親其隣之赤子乎? 彼有取爾也. 赤子匍匐將入井, 非赤子之罪也. 且天之生物也, 使之一本, 而夷子二本故也. 蓋上世嘗有不葬其親者, 其親死 則擧而委之於壑. 他日過之, 狐狸食之, 蠅蚋姑嘬之, 其顙有泚, 晲而不視. 夫泚也 非爲人泚 中心達於面目. 蓋歸反虆梩而掩之. 掩之, 誠是也, 則孝子仁人之掩其親, 亦必有道矣’ 徐子以告夷子, 夷子憮然, 爲間曰 ‘命之矣’(묵자이지, 인서벽이구견맹자. 맹자왈 ‘오고원견, 금오상병, 병유, 아차왕견’ 이자불래. 타일, 우구견맹자, 맹자왈 ‘오금즉가이견의, 부직즉도불현, 아차직지. 오문이자묵자. 묵지치상야, 이박위기도야. 이자사이역천하, 기이위비시이불귀야? 연이이자장기친후, 즉시이소천사친야’ 서자이고이자, 이자왈 ‘유자지도, 고지인, 약보적자, 차언하위야? 지측이위애무차등, 시유천시’ 서자이고맹자, 맹자왈 ‘부이자, 신이위인지친기형지자, 위약친기린지적자호? 피유취이야. 적자포복장입정 비적자지죄야. 차천지생물야, 사지일본, 이이자이본고야. 개상세상유부장기친자, 기친사 즉거이위지어학. 타일과지, 호리식지, 승예고최지, 기상유자, 예이불시. 부자야 비위인자, 중심탈어면목. 개귀반류리이엄지. 엄지, 성시야, 즉효자인인지엄기친, 역필유도의’ 서자이고이자, 이자무연, 위간왈 ‘명지의’) 5-5]
맹자의 어머니가 어린 맹자를 위해 세 번씩이나 이사했다는 이야기와 같이, 사람이 사는 곳은 매우 중요합니다. 공자의 말이 다시 떠오릅니다. ‘인자한 마을에 사는 게 좋다. 사는 데를 가려서 인자한 마을에 살지 않으면 어찌 지혜롭다고 하겠느냐?’(里仁爲美 擇不處仁, 焉得智? 이인위미 택불처인 언득지?) 여기에서 나는 ‘이’(里)를 ‘향리’(鄕里), 즉 ‘마을’로 보았습니다. 이는 바로 주주(朱注)에 따른 경우입니다. 물론, 조주(趙注)는 ‘이’(里)를 ‘거’(居)의 뜻으로 풀었습니다. 그런데 ‘인자한 마을’이란 어떤 곳일까요? 말할 것도 없이, ‘인자한 사람이 많이 사는 마을’을 가리키겠지요. 하지만 그런 마을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적어도 나는 ‘이름이 인자한 동네’에 살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됩니다.
일시에 하늘 안고 물소리가 쏟아지면
강둑이 무너지듯 맥없이 열리는 먼동
힘차게 또 한 하루가 산허리를 내찬다.
밤새운 가로등은 옅은 꿈에 기대 졸고
저마다 눈 비비며 깨는 다세대 주택들
새하얀 까치 소리도 머리 위로 날아간다.
해 비친 산자락이 잠자리를 정돈하면
산책을 다녀와서 분주히 채비한 오늘
다시금 이웃이 정답게 눈인사를 나눈다.
-졸시 ‘열리는 인헌동’ 전문
내가 사는 동네의 원래 이름은 ‘봉천11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슨 동네 이름에 죄수들처럼 번호를 그리 붙였는가?’라고 손가락질했습니다. 그 때문에 구청에서는 동민들의 의견들을 모두 들은 후에 ‘인헌동’(仁憲洞)이라고 동네 이름을 바꿨습니다. ‘인헌’(仁憲)이란, 고려 강감찬(姜邯贊) 장군의 시호(諡號)입니다. 그리고 ‘시호’는 ‘제왕이나 재상 등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적을 칭송하여 붙이는 이름’입니다. 물론, 강감찬 장군은 이 고장에서 태어나셨지요. 이름은 중요합니다. 자꾸 부르다 보면, 그 이름처럼 된다고도 합니다. 우리 동네에 ‘인헌중학교’와 ‘인헌고등학교’가 있습니다.(글: 김 재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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