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바라보고 가는 것은 ‘어짊’이라는 한 가지이다
기원전 314년, 맹자는 59살이 되었습니다. 맹자의 권유를 뿌리치고 제(齊) 나라가 연(燕) 나라를 정벌하였으니, 맹자는 제(齊) 나라에 더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맹자는 제 나라 객경 노릇을 그만두고 추(鄒)나라로 돌아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제(齊) 나라 선왕(宣王)이 맹자에게 손수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전날에 만나보기를 원했지만 만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한 조정에서 모실 수 있게 되어서 매우 기뻤습니다. 그런데 이제 또 과인을 버리고 돌아가시겠다고 하시니, 이 뒤에도 계속 만나 볼 수가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감히 그렇게 하자고 청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참으로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前日願見而不可得, 得侍同朝, 甚喜. 今又棄寡人而歸, 不識可以繼此而得見乎?’ ‘不敢請耳 固所願也’(‘전일원견이불가득, 득시동조, 심희. 금우기과인이귀, 불식가이계차이득견호?’ ‘불감청이 고소원야’) 4-10]
그 뒤 어느 날, 선왕(宣王)이 신하인 ‘시자’(時子, 제나라 왕 측근)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제(齊) 나라 복판에다 맹자에게 집을 마련해 주고, 또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만 종(萬鐘)이나 되는 녹봉을 주어서 여러 대부와 백성들이 모두 그를 공경하고 본받게 하고 싶소. 그대가 나 대신 이 이야기를 전해 주지 않겠소?”
그래서 ‘시자’(時子)가 맹자의 제자인 ‘진진’(陳臻 본문에서는 진자‘陳子’)을 통하여 맹자에게 그 말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진진’이 ‘시자’의 말을 맹자에게 전하자, 맹자가 듣고 말했습니다.
“그러하다.(然) 하기야 ‘시자’가 어찌 내가 제나라에 더 머무르지 않는 까닭을 알겠는가? 만일 내가 부자 되기를 바란다면 전에 내가 십만 종의 녹을 받는 경(客卿) 자리를 스스로 그만두고 지금 만 종의 녹을 받겠느냐? 일찍이 계손씨(季孫氏)는 이런 말을 하였다. ‘자숙의(子叔疑)는 참 이상한 사람이다. 처음 자기가 정치를 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만두고 말 일이지, 또 자기 자제에게 경(卿相) 노릇을 시키다니. 사람치고 그 누군들 부귀를 원하지 않겠는가마는 자숙의 같은 사람은 너무 부귀에 연연하여 자기 혼자서만 부귀 안에서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라고. 만일 나도 만 종의 녹을 탐낸다면 자숙의와 같이 부귀에 미련을 갖는 사람이 되고 만다. 옛 시장 거래는 물물교환으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물건과 가지고 있지 않은 물건을 서로 바꾸었고, 관원(有司)은 시장에서 생기는 다툼을 다스릴 뿐이고 세금을 징수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어느 마음씨 나쁜 사나이가 나온 다음에 우뚝 솟은 높은 자리를 찾아 올라가서 좌우를 바라보며 이익이 있을 만한 것을 모두 차지하려고 하였다.(罔市利 망시리, 여기에서의 ‘龍’은 ‘壟’과 같음)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그 사나이를 천하게 여겼고 관원은 그 사나이에게 세금을 매기게 되었다. 상인에게 세금을 매기게 된 것이 이 마음씨 나쁜 사나이로부터 시작되었다.”
[他日, 王謂時子曰 ‘我欲中國而授孟子室, 養弟子以萬鍾, 使諸大夫國人, 皆有所矜式, 子盍爲我言之?’ 時子因陳子而以告孟子, 陳子以時子之言告孟子. 孟子曰 ‘然. 夫時子惡知其不可也? 如使予欲富, 辭十萬而受萬 是爲欲富乎? 季孫曰 <異哉子叔疑! 使己爲政不用, 則亦已矣, 又使其子弟爲卿. 人亦孰不欲富貴? 而獨於富貴之中, 有私龍斷焉.> 古之爲市者, 以其所有, 易其所無者, 有司者治之耳. 有賤丈夫焉, 必求龍斷而登之, 以左右望而罔市利. 人皆以爲賤, 故從而征之, 征商, 自此賤丈夫始矣.(타일, 왕위시자왈 ‘아욕중국이수맹자실, 양제자이만종, 사제대부국인, 개유소긍식, 자합위아언지?’ 시자인진자이이고맹자, 진자이시자지언고맹자. 맹자왈 ‘연. 부시자오지기불가야? 여사여욕부, 사십만이수만 시위욕부호? 계손왈 <이재자숙의! 사기위정불용, 즉역이의, 우사기자제위경. 인역숙불욕부귀? 이독어부귀지중, 유사롱단언.> 고지위시자, 이기소유, 역기소무자, 유사자치지이. 유천장부언, 필구롱단이등지, 이좌우망이망시리. 인개이위천, 고종이정지, 정상, 자차천장부시의.) 4-10]
여기에서 ‘만 종의 녹’(萬鍾之祿)이라고 했는데, 도대체 ‘종’(鍾)이란 얼마나 되는 부피일까요? 앞에서(9장) 조금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맹자가 살았던 당시에 1종(鍾)은 6곡(斛, 휘)4두(斗, 말)였다고 말했지요? 그러나 그 부피는 시기마다 지역마다 달랐답니다.
중국 한(漢)나라 때의 사람인 ‘유향’(劉向)의 글을 빌리면, 1종(鍾)은 8곡(휘‘斛’ 또는 섬‘石’)이랍니다. 그리고 1곡(斛)은 10두(말‘斗’)이고 1두(斗)는 10승(되‘升’)이며 1승(升)은 10갑(홉‘合’)이고 1갑(合)은 10약(龠)이랍니다. 그러면 ‘약’(龠)은 얼마만큼의 부피일까요? 1약(龠)은,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검은 기장’(黍) 1,200알의 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기장을 표준으로 하되, 10속(粟)을 1푼(分)으로 하며, 10푼을 1촌(寸)으로 하고 10촌을 1척(尺)으로 하며, 10척을 1장(丈)으로 합니다. 그런가 하면 또, 기장으로 하되, 16서(黍)를 1두(豆)로 하고 6두를 1수(銖)로 하며 34수의 중량을 1냥(兩)으로 하며 16냥을 1근(斤)으로 하고 30근을 1균(鈞)으로 하며 4균의 무게를 1석(石)으로 하였답니다. 이는 유향의 ‘설원’(說苑757)에 들어 있는 내용입니다.
물론, 부피뿐만 아니라 길이도 나라와 시기마다 서로 달랐답니다. 한 예로, ‘척’(尺)은, ‘길이를 재는 손의 모양을 본떠서 만든 글자’랍니다. 그래서 공자가 살았던 당시에는, 1척(尺)이 지금(30센티미터)과 달리 6촌(寸)2푼(分)2리(厘)에 해당되는 길이였답니다. 즉, 18.66센티미터입니다. 지금 내가 주먹을 쥐고 엄지와 검지로 한 뼘의 길이를 재어 보니 18센티미터 정도입니다. 아마도 이게 1촌의 처음 길이였을 듯싶습니다. 길이가 길어지는 이유는 세금 때문이랍니다.
또, 제 나라에서 말 잘하기로 이름난 순우곤(淳于髡)이 맹자에게 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앞에서 두 번이나 등장했습니다.
“명예와 공적을 앞세우는 사람은 백성들을 위해서 일하고, 명예와 공적을 뒷전으로 돌리는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 일합니다. 선생께서는 *‘삼경’(三卿) 가운데 계시면서 명예와 공적을 윗사람과 아랫사람에게 보태시지 않고, 이 나라를 떠나려고 하십니다. 인자한 사람은 본래 그렇습니까?”
“평민의 신분으로 아래에 있으면서 현명한 몸으로 어리석은 임금을 섬기지 않은 사람이 바로 ‘백이’(伯夷)입니다. 다섯 차례 탕왕(湯王)에게 나갔다가 다섯 차례 걸왕(桀王)에게 나간 사람이 ‘이윤’(伊尹)입니다. 그리고 더러운 임금을 싫어하지 않고 작은 벼슬자리를 마다하지 않은 사람이 ‘유하혜’(柳下惠)입니다. 이 세 사람은 같지 않으나, 그 향하는 바는 한 가지였습니다. 그 한 가지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인’(仁)이었습니다. 군자는 ’인‘을 지키려고만 하면 되는 것이지, 그 방법이 어찌 꼭 같아야 하겠습니까?”
[淳于髡曰 ‘先名實者 爲人也. 後名實者 自爲也. 夫子在三卿之中, 名實未加於上下, 而去之. 仁者固如此乎?’ 孟子曰 ‘居下位 不以賢事不肖者 伯夷也. 五就湯 五就桀者 伊尹也. 不惡汙君 不辭小官者 柳下惠也. 三子者 不同道 其趨一也. 一者何也? 曰 <仁也> 君子亦仁而已矣 何必同?’(순우곤왈 ‘선명실자 위인야. 후명실자 자위야 부자재삼경지중, 명실미가어상하, 이거지. 인자고여차호?’ 맹자왈 ‘거하위 불이현사불초자 백이야. 오취탕 오취걸자 이윤야. 불오오군 불사소관자 유하혜야. 삼자자 부동도 기추일야 일자하야? 왈 <인야> 군자역인이이의 하필동?) 12-6]
앞의 ‘부자재삼경지중’(夫子在三卿之中)에서 ‘삼경’은 ‘상경’(上卿)과 ‘아경’(亞卿)과 ‘하경’(下卿)을 가리킵니다. 그런가 하면 ‘상’(相)과 ‘장’(將)과 ‘객경’(客卿)을 나타내기도 한답니다. 맹자가 제나라 객경이었기에 한 말인지, 맹자가 실제로 그런 대우를 받았기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오취탕 오취걸자’(五就湯 五就桀者)에서 ‘오’(五)는 ‘다섯 번’이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여러 번’이라는 뜻으로 풀이하는 게 좋을 성싶습니다.
순우곤이 다시 묻고 맹자가 다시 대답했습니다.
“노(魯) 나라 목공(繆公) 때에는 ‘공의자’(公儀子)가 국정을 맡았고 ‘자유(子柳)와 ‘자사’(子思, 공자의 손자)가 신하로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노(魯) 나라의 땅을 이웃 나라에게 더욱 많이 깎였으니, 그처럼 현인들이 무익합니까?”
“우(虞) 나라는 ‘백리해’(百里奚)를 등용하지 않았다가 망했고, 진(秦) 나라 목공(穆公)은 그를 등용하여 패자가 되었습니다. 현인을 쓰지 않으면 나라가 망합니다. 깎여서 약해지는 일이 어찌 있겠습니까?
“예전에 노래를 잘하는 ‘왕표’(王豹)가 기수(淇水) 가에 살자, 하서(河西) 사람들이 노래를 잘 불렀습니다. 또, 노래를 잘하는 ‘면구’(綿驅)가 ‘고당’(高唐)에 살자, 제(齊) 나라 서부(右) 사람들도 노래를 잘 불렀습니다. 제(齊) 나라 대부였던 ‘화주’(華周)와 ‘기량’(杞梁)의 아내들이 남편의 상을 당하여 곡(哭)을 잘하자, 제(齊) 나라 여인들의 풍속이 바뀌었습니다. 속에 들어 있으면 반드시 밖으로 드러나는 법입니다. 일을 잘했는데도 공적이 드러나지 않는 경우를 저는 지금껏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제나라에는 현인이 없는 모양입니다. 만약에 현인이 있었더라면 제가 반드시 알았겠지요.”
“공자(孔子)께서 노(魯) 나라 사구(司寇)가 되셨지만, 노(魯) 나라 임금은 더 높이 등용하지 않았습니다. 공자께서 노 나라 임금을 따라서 제사(祭)에 참례하신 적이 있었는데, 임금이 익힌 고기(燔肉)를 나누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면복(冕服)조차 벗지 않은 채로 노(魯) 나라를 떠나셨습니다. 속을 모르는 사람은 익힌 고기 때문이라고 하겠지만, 속을 아는 사람은 임금이 무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공자께서 조그만 죄를 핑계 삼고 떠나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차하게 그만두려고 하지 않으신 겁니다. 군자가 하는 행위를 여느 사람들은 잘 알 수가 없답니다.”
[曰 ‘魯繆公之時, 公儀子爲政, 子柳子思爲臣, 魯之削也滋甚, 若是乎賢者之無益於國也?’ 曰 ‘虞不用百里奚而亡, 秦穆公用之而覇. 不用賢則亡 削何可得與? 曰 ‘昔者, 王豹處於淇而河西善謳, 綿駒處於高唐而齊右善歌, 華周杞梁之妻, 善哭其夫而變國俗. 有諸內 必形諸外, 爲其事而無其功者, 髡未嘗覩之也. 是故無賢者也, 有則髡必識之’ 曰 ‘孔子爲魯司寇, 不用. 從而祭, 燔肉不至, 不稅冕而行. 不知者以爲爲肉也, 基知者以爲爲無禮也. 乃孔子則欲以微罪行 不欲爲苟去 君子之所爲, 衆人固不識也’(왈 ‘노목공지시, 공의자위정, 자유자사위신, 노지삭야자심, 약시호현자지무익어국야?’ 왈 ‘우불용백리해이망, 진목공용지이패. 불용현즉망 삭하가득여?’ 왈 ‘석자, 왕표처어기이하서선구, 면구처어고당이제우선가, 화주기량지처, 선곡기부이변국속. 유저내 필형저외, 위기사이무기공자, 곤미상도지야. 시고무현자야, 유즉곤필식지’ 왈 ‘공자위노사구, 불용. 종이제, 번육부지, 불세면이행. 부지자이위위육야, 기지자이위위무예야. 내공자즉욕이미죄행 불욕위구거 군자지소위, 중인고불식야’) 12-6]
앞의 ‘면구처어고당이제우선가’(綿駒處於高唐而齊右善歌)에서 ‘제우’는 ‘제 나라 서쪽’을 이릅니다. 남쪽을 향하여 서면 오른쪽이 서쪽이고 왼쪽이 동쪽입니다. 이는, 임금이 남쪽을 향하고 앉기 때문입니다. 또, ‘불세면이행’(不稅冕而行)에서 ‘세’는 ‘탈’(脫)과 같은 뜻으로 ‘벗음’을 나타내고 ‘면’은 ‘임금의 정장에 쓰던 면류관(冕旒冠)’이나 ‘대부(大夫) 이상이 쓰던 예관(禮冠)’을 말하는데 여기에서는 후자를 이릅니다.
그런데 ‘조그만 죄를 핑계 삼는다’라는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요? 공자는 전부터 떠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임금에게 허물을 돌리고서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또, 아무 이유도 없이 굳이 떠남으로써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는 말도 듣고 싶지 않아서 그대로 머물러 있었지요. 그때 마침 그런 일이 있어서 그 기회에 떠난 겁니다.
그건 그렇고 맹자가 살던 시기가 전국시대(戰國時代)라는 말을 앞에서 했지요? 그런데 제(齊) 나라는 그 당시에 힘이 아주 센 일곱 나라 중에 하나로 꼽혔습니다. 이들을, ‘전국 7웅’(戰國七雄)이라고 합니다.
***역사 알아보기
‘전국 7웅’(戰國七雄)이란, ‘전국시대에 중국의 패권을 놓고 다투었던 7대 강국’을 일컫는 말입니다. 즉, 동방의 제(齊) 나라와 남방의 초(楚) 나라와 서방의 진(秦) 나라와 북방의 연(燕) 나라, 그리고 중앙의 위(魏) 나라와 조(趙) 나라와 한(韓) 나라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춘추시대에는 독립된 작은 도시국가 100여 나라가 흩어져 있었으나, 중기 이후에 농업생산조직의 향상과 상업경제의 발달에 따라 강대한 영역 국가가 만들어졌습니다. ‘7웅’(七雄)이란 이런 크고 힘 있는 일곱 국가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 일곱 나라는 더욱 크고 힘 있는 나라가 되려고 나라 다스림에 더욱 충실하고 나라 살림을 더욱 크게 넓히려고 모든 힘을 다하였습니다. 이 중에서 진(秦) 나라는 상앙(商鞅)의 변법 이후에 나라의 힘이 크게 자라서 기원전 221년에는 마침내 중국의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중국을 통일한 진(秦) 나라와 춘추시대 5패에 들어 있던 진(晋) 나라는 다른 나라입니다. 진(晋) 나라는 전국시대로 와서 조(趙) 나라와 위(魏) 나라와 한(韓) 나라로 나뉘었습니다. 그러면 조금 더 자세히 일곱 나라에 관하여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진(秦) 나라(기원전 221년~기원전 206년)는, 목축으로 이름이 나 있던 ‘대구’(大丘)라는 지역의 ‘비자’(非子)가 주(周) 나라 효왕(孝王)으로부터 진읍(秦邑)의 책임자로 봉해져서 서융(西戎)의 방위를 맡음으로써 ‘진’(秦)을 일으켰습니다. 그 후 ‘진’은 8세기 초에 주 나라가 ‘견웅’(犬戎)의 공격받았을 때 ‘유왕’(幽王)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771년에 ‘평왕’(平王)이 동쪽 ‘낙읍’(洛邑)으로 천도하였을 때 그를 호위한 공으로 산시성(陜西省)의 서부 지역을 맡음으로써 제후(諸侯)로 승격하였습니다. 이 시기는 양공(襄公) 때였지요.
초(楚) 나라(기원전 847년~기원전 223년)는, 남방의 유력한 부족장이었던 ‘육웅’(鬻熊)의 후예들이 ‘초’(楚, 지금의 호북성) 땅에 세운 나라입니다. 서울은 ‘영’(郢, 삼국지에 나오는 강릉)이고 지리적으로 정(鄭)나라 제(齊) 나라 위(衛) 나라 중원제국들과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서주시대(西周時代)와 춘추시대(春秋時代)를 통하여 독자적으로 발전하면서 중원(中原)과는 사뭇 다른 정치와 문화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연(燕) 나라(기원전 1057년~기원전 222년)는, 주(周)나라를 창건하는 데 공을 세운 ‘삼공’(三公) 중의 한 명인 ‘소공’(召公)이 제후(諸侯)로 봉해진 나라입니다. 서울은 ‘계성’(薊城)이었지요. ‘소공’은 주(周) 나라 ‘문왕’(文王)이 죽고 나서 그의 어린 아들인 ‘성왕’(成王)을 대신하여 주공(周公) 단(但)과 함께 주(周) 나라를 동주(東周)와 서주(西周)로 나누어서 다스렸습니다. 그리고 ‘성왕’(成王)이 장성하자, 주(周)나라를 돌려주고 자기 봉지인 연(燕)나라로 돌아갔습니다. 연(燕) 나라는 전성기에 영토가 동으로는 고조선(古朝鮮)에 이르고, 남으로는 ‘역수’(易水)에까지 사방 2,000리에 달하였다고 합니다.
제(齊) 나라(기원전 1046년~기원전 221년)는, 주(周) 나라 ‘문왕’(文王)이 나라를 세울 때 재상 태공망(太公望, 姜太公)에게 봉토를 내림으로써 나라가 세워졌습니다. 그 이후, 제(齊) 나라 환공(桓公) 시대에 ‘관중’(管仲)을 등용하여 패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지요. 그리고 제(齊) 나라 경공(景公) 때에는 ‘안영’(晏嬰)을 등용하였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386년, ‘전화’(田和)가 제(齊) 나라 ‘강공’(姜公)을 폐하면서 제후의 성씨가 ‘강씨’(姜氏)에서 ‘전씨’(田氏)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맹자는 선왕(宣王) 때에 객경(客卿)의 벼슬살이를 했지요.
한(韓) 나라(기원전 403년~기원전 230년)와 위(魏)나라(기원전 403년~기원전 225년)와 조(趙) 나라(기원전 403년~기원전 228년) 등은, 춘추시대 말기에 그들이 속해 있던 진(晋)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3등분(三家分割)하여 각기 나라를 세웠습니다. 물론, 주(周) 나라의 위열왕(威烈王)으로부터 모두 제후(諸侯)로 인정받았습니다. 여기의 세 나라 가운데 맹자와 관계가 큰 나라는 위(魏) 나라입니다. 위사(魏斯)는 안읍(安邑)에 도읍하였고 그 아들 무후(武侯)는 조(趙)·한(韓)과 함께 진(晋)을 멸망시켰습니다. 위(魏)나라는 다른 열강들에 비해 영토가 그리 넓지는 않았으나 중원에 위치하여 인구가 많고 문화가 뛰어나서 나라의 세력이 날로 번창하였습니다. 위나라는, 그 서울을 ‘대량’(大梁)으로 옮긴 후부터 ‘양(梁)나라’라고도 부른다는 사실도 잊지 않았지요? 맹자는 혜왕(惠王)과 여러 차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한(韓) 나라는 ‘한호’(韓虎, 또는 韓康子)가 위(魏)·조(趙)와 더불어서 진(晋) 나라의 지백(知伯) ‘요’(瑤)를 죽이고 독립하였습니다. 그 후,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했습니다. 또, 조(趙)나라는, ‘조성’(趙城)에 살던 사람이 조씨(趙氏) 성을 갖게 되었으며, 그들은 춘추시대에 이르러 진(晋) 나라에서 벼슬을 하였고 공을 세웠습니다. 그 이후, 조간자(趙簡子 기원전 518~458)와 조양자(趙襄子 기원전 458~425) 시대에 세력을 널리 키웠습니다. 그때 이미 진(晋) 나라의 그늘에서 벗어났습니다. 초기에는 진양(晋陽)에 도읍하였고, 그 후에 중모(中牟)와 한단(邯鄲)으로 옮기었습니다.
58세가 되던 1998년, 나는 도서출판 ‘서민사’를 통해서 여러 권의 저서를 펴냈습니다. 그 첫 권은, 25명의 시인에게 들꽃 하나씩을 증정한 평론집 ‘들꽃과 시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둘째 권은, 전에 민통선을 찾아다니며 쓴 ‘시조’와 ‘시’ 및 산문들을 묶은 ‘민통선 탐방기’였습니다. 이 책은 그해에 환경부로부터 ‘우수 환경도서’에 선정되었습니다. 또, 셋째 권은, 150종류의 화초와 화목에 대한 전설에 시조 한 수씩을 곁들인 ‘꽃은 예뻐서 슬프다’였습니다. 이 책은 ‘화목편’과 ‘화초편’으로 나누어서 펴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동안 써 놓은 시들을 묶어서 시집 ‘치자꽃, 너를 만나러 간다’를 펴내기도 했습니다.
문인이라면 책으로 ‘베풂’을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루나무 아래에서 그 위를 올려다보면
가지들이 쉴 새 없이 빈 하늘을 쓸고 있지
묵묵히 소매를 걷고 걸레질도 하고 있지.
미루나무 숨긴 베풂 그게 이리 있었기에
맑은 가슴 여는 마음 엿볼 수가 있는 거지
그나마 따뜻한 햇볕 그렇기에 받는 거지.
-졸시 ‘숨어 있는 선행’
나무는 나무대로 자기가 할 수 있는 방법을 택하여 ‘베풂’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렇듯 저마다의 방법으로 저마다의 능력껏 ‘베풂’을 실천한다면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늘 조그만 노트 한 권을 몸에 지니고 다닙니다. 시상이 떠오를 때마다 메모해 두려는 의도입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기도 합니다. 문득 맹자의 말 한마디가 떠오릅니다. ‘가욕지위선!’(可欲之爲善! 하고자 함이 ‘옳은 것’을 ‘착하다’라고 한다!) 그렇습니다. 나는 그게 바로 ‘내가 하고자 하는 가장 옳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글: 김 재 황)
''맹자' 아니 '멍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18. 눈동자는 악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글: 녹시 김 재 황) (0) | 2022.04.04 |
---|---|
17. 그때는 그때이고 이때는 이때이다(글: 녹시 김 재 황) (0) | 2022.04.04 |
15. 덕성이 속에 가득차면 '아름답다.'라고 한다(글: 녹시 김 재 황) (0) | 2022.04.03 |
14. 왕이 음악을 좋아하면 나라가 잘 다스려진다(글: 녹시 김 재 황) (0) | 2022.04.03 |
12. 모든 사람에게 그 마음이 미치게 한다(글: 녹시 김 재 황) (0) | 2022.04.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