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사랑, 녹색 세상] 편
구상나무
김 재 황
더위를 안기 싫어 산정으로 숨을 끌면
촘촘히 조여 오는 아프도록 시린 연륜
외롭게 푸른 자존을 침을 찔러 일으킨다.
높직이 쳐든 머리 꼿꼿한 기상을 얹고
그 넓은 앞가슴에 장한 외침을 묻으면
밤에도 눈뜨는 혼이 별빛처럼 다가선다.
피안까지 기어가는 산줄기를 타고 앉아
목마른 염원으로 그려 내는 열반의 꿈
가벼이 하얀 숨결만 안개 속을 날아간다.
(2002년)
(시작 노트)
지금으로부터 약 50억 년 전에 지구가 만들어지고, 그 한참 뒤에 생명이 탄생했다. 그때에는 더운 여름만 계속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데, 그런 날씨 속에서 식물들은 그저 자라기만 하다가, 차차 기후가 변하여 겨울이 생기자 나무들은 살아남기 위해 씨앗을 만들었을 성싶다. 그렇게 얼음이 이 지구의 거죽을 덮고 있을 때, 구상나무는 낮은 자리에서 큰 숲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듯 추위를 좋아하는 구상나무는, 우리나라 특산수종이다. 이제는 더위를 피해 한라산․덕유산․지리산․무등산 등의 높은 지대에서 자생한다. 그러므로 높은 산정으로 오르면, 구상나무를 만나는 기쁨이 있다. 구상나무는 하늘처럼 마음을 모두 비우고, 구름처럼 가벼운 몸으로 살아간다.
나는 한라산과 지리산의 구상나무를 특히 좋아하는데, 한라산의 백록담을 굽어보고 있는 구상나무는 어쩐지 지리산의 노고단 임걸령에 사는 구상나무에 비해 수심에 차 있는 듯한 모습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백록담에 목욕하러 내려온 선녀들이 안개 같은 치마를 그 한라산의 구상나무 가지에 걸어놓았다는 옛 전설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상록 침엽교목인 구상나무는, 나무껍질이 흰 느낌이 들어서 깨끗한 입성의 신선을 보는 듯하다. 게다가 잎 뒷면 또한 은색(銀色)으로 빛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높은 산에 삶의 터를 마련한 것만 보아도 결코 범상한 나무는 아니다. 잎은 전나무처럼 생겼으나, 끝이 둘로 갈라져 있다. (200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