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조 1411

한라산에서/ 김 재 황

[양구에서 서귀포까지] 편 한라산에서 김 재 황 태초에 첫울음을 불덩이로 토해내고 신비한 손을 뻗어 세상 문을 열던 자리 그 숨결 아직 머무니 하늘 저리 시리다. 적막에 배가 부른 비자림이 팔 벌리면 흰 구름 갈 곳 몰라 산봉우릴 맴도는데 전설을 가슴에 안고 골짜기로 가는 바람. 안개가 보자기로 산길을 모두 숨길 때 가다가 선 산자락에 꿈이 쏟아지는 소리 큰 바다 멀리 밀치고 볼이 익는 열매여. (2011년)

오늘의 시조 2022.10.01

연시조 1편

[내 사랑, 녹색 세상] 편 내 마음에 발을 치고 김 재 황 나서기 좋아하니 꽃을 못 피우는 걸까, 오히려 숨었기에 저리 환한 제주한란 그 모습 닮아 보려고 내 마음에 발을 친다. 햇빛도 더욱 맑게 조금씩 걸러 담으면 일어서는 송림 사이 산바람은 다시 불고 물소리 안고 잠드는 에덴의 숲이 열린다. 반그늘 딛고 사니 모든 일이 편한 것을 이리 눈감고 앉으면 찾아오는 휘파람새 먼 이름 가깝게 불러 꽃과 향기 빚어 본다. (2002년) (시작 노트) 나는 나에게 부여된 이 삶을 예쁘게 가꾸기를 희망한다. 한 포기의 한란처럼 비록 그늘 밑에 자리를 잡았다고 하더라도,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기를 갈망한다. 한란은 깊은 산골짜기에 숨어서 바람과 벗하여 향기를 빚으며 살아간다. 그야말로 군자의 꽃이라고 말할 수 ..

오늘의 시조 2022.09.30

연시조 1편

[내 사랑, 녹색 세상] 편 아내 김 재 황 언제나 그 걸음은 흘러서 가는 춤사위 무성한 월계수를 가슴 안에 세워 두고 하늘은 너무 푸르네, 안개 가득 머금었다. 밤길이 멀었는데 벌써 달은 기우는가, 문풍지 울음 뱉는, 결 삭은 툇마루 앞에 그 숨결 부서져 내린 서릿발이 한 사발. 출렁인 서러움은, 물빛 시린 그 미소는 기러기 지친 날개 휘어져 걸린 고달픔 그래도 그대 얼굴은 내 꿈마다 밝게 뜬다. (2002년) (시작 노트) 내가 시인의 길을 가고자 하였을 때, 아내는 극구 만류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가장이라는 사람이 돈을 열심히 벌어서 가족을 먹여 살릴 생각은 안 하고, 돈 한 푼 생기지 않는 시를 쓰겠다고 나섰으니, 어디 그게 말이나 되는가. 그러나 나는 막무가내였다. 말리지 못한 아내는 자..

오늘의 시조 2022.09.29

연시조 1편

[내 사랑, 녹색 세상] 편 백송을 바라보며 김 재 황 대세를 거슬러서 자각의 침 치켜든 채 저물어 가는 세상 탄식하며 깨운 세월 이 시대 앓는 숨소리, 그대 만나 듣습니다. 켜켜이 떨어지는 일상 조각 모두 모아 저승꽃 피워 내듯 몸 사르며 걸어온 길 그대가 남긴 발자취, 내가 지금 따릅니다. 뒤꼍의 외진 자리 이제 다시 찾아가서 남루한 입성 걸친 그림자를 밟고 서면 하늘에 오른 흰 구름, 그대 닮아 보입니다. (2002년) (시작 노트) 1987년, 나는 신춘문예만을 고집하지 않기로 하고, 월간문학 신인 작품상 모집에 응모하여 당선되었다. 그 무더운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8월이었다. 그때의 기분은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이제는 갈 길이 정해졌으니, 그 길만 걸어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곧 한국..

오늘의 시조 2022.09.28

연시조 1편

[내 사랑, 녹색 세상] 편 낙성대에서 김 재 황 시인이 되려는 꿈 차마 버릴 수 없기에 십 년이나 살던 섬을 훌훌 털고 떠나자니 가슴속 차는 시름이 파도처럼 철썩거리데. 하필 이 자리인가 넓고 넓은 세상에서 천릿길이 서운해도 아내는 봇짐을 풀며 무겁게 남쪽을 누르는 관악산을 바라보았지. 멀리 친구를 두고 온 아이들의 손을 잡고 문창성 떨어진 곳, 탑을 찾아 올라가니 옛 고려 파란 하늘에 서귀포가 출렁거리데. (2002년) (시작 노트) 1986년, 나는 그곳의 농장을 팔기로 하고, 온 가족을 이끌고는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관악산 밑에 작은 집을 마련했다.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낙성대(落星垈)가 있다. 낙성대는 고려의 명장인 강감찬(姜邯瓚)이 출생한 곳이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3대인..

오늘의 시조 2022.09.27

연시조 1편

[내 사랑, 녹색 세상] 편 서귀포 귤밭 김 재 황 자리가 좁은 나무는 바람 딛고 일어선다, 가지를 불쑥 내밀며 불거진 작은 외침 뜨거운 빛 한 자락이 잎새 끝에 떨어진다. 돌담 넘는 물보라가 서슬을 세우며 가고 구름이 내려앉으면 가슴을 뒤덮는 강물 파랗게 위엄을 일으켜 숲이 숲을 이끈다. 하늘을 밟고 올라 쿵쿵 가슴 뛰는 소리 일제히 초록 깃발 펼쳐 보인 귤밭이여 지금껏 참아 온 꿈이 꽃과 함께 타오른다. (2002년) (시작 노트) 그러나 나는 시(詩)를 포기할 수 없었다. 회사에서 중책을 맡을수록 내 시간을 얻기가 어려워졌다. 작더라도 내 농장에서 자유롭게 일하며 시를 쓰고 싶었다. 1973년 8월, 나는 그때 결혼을 몇 달 앞두고 있었지만, 끝내는 사표를 내고 말았다. 그 일로, 바느질하고 계시던..

오늘의 시조 2022.09.26

연시조 1편

[내 사랑, 녹색 세상] 편 신불산에서 김 재 황 외로움에 떼밀려서 산자락을 밟고 서면 개비자 순한 잎새 마주 보며 깨어 있고 명상 깬 녹차 향기가 폐부 깊이 스며든다. 반짝이며 흘러내린 석간수에 마음 씻고 먼 하늘 바라보면 출렁이는 물결 소리 적막을 깔고 앉아서 안식의 손 잡아 본다. 산 위는 숲이 없고 억새만 무성한 분지 자유를 얻은 염소 홀로 사는 세상인데 이따금 하얀 신선이 빈 몸으로 찾아온다. (2004년) (시작 노트) 3년이 흘렀다. 그때, 삼성 그룹에서는 ‘용인자연농원’의 개발사업을 계흭하고 있었다. 그 사업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농업전문가들이 필요했다. 나는 타의에 의해서 그 공채시험을 치게 되었고, 중앙일보사의 농업직 3급 사원이 되었다. 나는 ‘용인자연농원’ 팀의 한 사람으로 과수 분야..

오늘의 시조 2022.09.25

연시조 1편

신병훈련소에서 김 재 황 힘차게 하나둘셋넷 연병장을 다져 간다, 발맞춤이 땅 구르면 입맞춤은 하늘 닿고 소매로 땀내를 흩는 무등병들 그 행렬. 몇 분씩 휴식 아껴 화랑담배 입에 물면 눌러 쓴 철모 끈에 안보 그도 대롱거려 고향 녘 환한 낮달은 눈웃음을 짓는가. 황산벌에 퍼져 가는 총검술 그 기합 소리 무르팍이 깨진 만큼 높이 서는 간성이여, 이 밤도 꿈길의 별은 이마에서 빛난다. (2002년) (시작 노트) 1965년 2월에, 나는 고려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러나 병무청의 사무 착오로 입대 통지서가 나오지 않았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한가하게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궁리 끝에 훈련소로 직접 가서 현지입대를 했다. 나는 마침내 제1훈련소 29연대에 소속되었고, 2달 동안의 피나는 훈련이 시작..

오늘의 시조 2022.09.24

연시조 1편

[내 사랑, 녹색 세상] 편 그때 그 친구 김 재 황 빛바랜 사진첩에 어린 티로 머문 친구 머리는 박박 깎고 검은 교복 맞춰 입고 그리운 그 모습 그대로 의젓하게 앉아 있다. 지금은 손자 두고 주름도 깊었을 친구 공부는 키를 재고 싫은 청소 서로 돕고 아직도 그 이름 석 자 생생하게 외고 있다. 그때를 떠올리면 더욱 보고 싶은 친구 눈빛은 너무 맑고 고운 입술 굳게 닫고 잘생긴 그 얼굴 그대로 따뜻하게 웃고 있다. (2002년) (시작 노트) 전쟁이 끝나고 상경하여, 흑석동의 은로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선린중학교와 배재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 농학과를 차례대로 마쳤다. 그러니까, 피난 시절의 몇 년 동안을 빼고, 나는 모든 학창 시절을 서울에서 보냈다. 서울에서도 여러 곳을 옮겨 다녔다. 즉, 흑석동에..

오늘의 시조 2022.09.23

연시조 1편

[내 사랑, 녹색 세상] 편 한라산에서 김 재 황 태초에 첫울음을 불덩이로 토해 내고 신비한 손을 뻗어 세상 문을 열던 자리 그 숨결 아직 머물러 물빛 저리 푸르다. 적막에 배가 부른 비자림이 팔 벌리면 흰 구름 갈 곳 몰라 산정 곁을 맴도는데 전설을 가슴에 안고 골짜기로 가는 바람. 안개가 잠이 깨어 산길을 모두 숨길 때 펼치고 선 산자락에 꿈이 쏟아지는 소리 큰 바다 멀리 밀치고 볼이 익는 열매여. (2002년) (시작 노트) 한라산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6.25 전쟁 때이다.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였던 나는, 1.4 후퇴 때에야 부모님을 찾아서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수소문 끝에, 제주도에서 부모님을 만났고, 제주시 제남초등학교 3학년에 편입할 수 있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한라산을 보았다. 그 ..

오늘의 시조 2022.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