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쥬르, 나폴레옹

(33) 선생님의 은혜

시조시인 2008. 9. 27. 08:23

(33)

 아주 훌륭한 선생님입니다. 이런 선생님의 은혜에 결초보은을 해야 합니다. ‘결초보은’(結草報恩)은, ‘죽은 후에도 은혜를 잊지 아니하고 갚는다.’는 뜻입니다. ‘너무나 깊고 큰 은혜에 감복해서 결코 잊지 않고 갚겠다.’는 다짐의 말로, 흔히 쓰이고 있습니다. 이 말은, 춘추전국시대의 진나라에서 나왔습니다.

‘위무자’라는 사람이 평소에 자기아들에게 일렀습니다.

“내가 죽거든 서모를 반드시 개가시켜 주기를 바란다.”

서모(庶母)는 ‘아버지의 첩’을 말합니다. 아마도 서모가 아들보다 나이가 아래였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위무자’가 죽음에 임박해서는 마음을 바꾸어서 서모를 순장하여 달라고 했습니다. ‘개가(改嫁)시킨다.’는 ‘다시 시집보낸다.’이고, ‘순장’(殉葬)은 ‘산사람을 죽은 사람과 함께 묻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들은 평소에 했던 아버지의 말을 따라 서모를 개가시켰습니다.

그 후에 그 아들이 전쟁에 나가서 싸우다가 적군에게 쫓기게 되었는데, 서모의 죽은 아버지 넋이 풀포기를 묶어 놓음으로써 쫓아오는 적군으로 하여금 걸려 넘어지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나도 어렸을 때에는 이처럼 훌륭한 선생님이 되기를 꿈꾼 적이 있습니다. 그럼요, 대학에 다닐 때에는 ‘야학’에서 학생들에게 실제로 수학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야학’을 모르겠다고요?

‘야학’(夜學)은, 야간학교와는 달리, 근로청소년이나 정규교육을 받을 형편이 못 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민간단체나 종교시설 또는 개인이 운영하는 비정규 교육기관입니다. 이 야학은 일제강점기에 크게 발달하였습니다. 심훈의 ‘상록수’라는 소설에 그 이야기가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일제강점 초기부터 생기기 시작한 이 야학의 공식적인 이름은, ‘사설학술강습회’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이 야학이 번성하게 된 시기는, 3.1운동이 일어난 다음부터입니다. 3.1운동 이후에 ‘민족실력양성운동’이 일어나며 교육열이 높아져서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갔지요. 이 때 활발했던 ‘야학운동’이 해방 후에도 이어져서 70년대와 80년대에는 ‘노동자를 위한 야학’과 중등과정을 마치지 못한 학생들을 위한 ‘검정고시 야학’ 등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런 야학들이 많이 없어져 버렸지요. 글쎄요? 지금도 그런 야학이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또, 선생님의 말 한 마디가 인생의 항로를 바꾸어 놓기도 합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입니다. 어느 날인가, 담임선생님이 교실에서 여러 아이들에게 내가 글짓기한 것을 읽은 후에 ‘아주 잘 지었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많은 노력 끝에 ‘문인’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나폴레옹은 아주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른 학생들과 어울려서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며 떠들게 되었습니다. ‘스스럼없다.’는 ‘스스럽다.’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스럽다.’는 ‘정분이 두텁지 않아서 매우 조심스럽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럼없다.’는 말은, ‘조심스럽지 않아도 된다.’의 뜻으로 ‘어려워하지 않는 사이’를 나타냅니다. 지금은 ‘매우 가까워서 대하기 어렵다거나 부끄러운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화이부동’을 지켰겠지요. ‘화이부동’(和而不同)은 ‘남과 화친하게 지내지만, 정의를 굽혀서까지 그 사람을 따르지 않음’을 일컫습니다.

저녁 식사를 끝낸 후에 아이들이 둘러앉아서 트럼프를 치게 되면, 나폴레옹도 그들과 함께 어울렸습니다. ‘트럼프’(trump)는 실내(室內)에서 하는 딱지놀이의 한 가지입니다. 하트(heart)와 다이아몬드(diamond)와 클로버(clover)와 스페이드(spade), 각 13매씩의 네 벌로 나뉘고, 그 밖에 조커(joker) 한 장을 합친 53장으로 되어 있지요. 이미 그건 다 알고 있다고요? 그러나 이 트럼프가 7세기 이전에 동양에서 발명되어 12세기 이전에 유럽으로 전해졌다는 사실은 몰랐을 겁니다. 트럼프를 다른 말로는 ‘플레잉 카드’(playing card)라고 합니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학교였다면 ‘윷놀이’나 ‘사물놀이’를 하였겠지요.

윷놀이는 언제 시작했을까요? 우리나라 초기 국가로 부여가 있었습니다. 송화강 상류에 자리를 잡았던 부여는, 5부족 연맹체로서 각기 부족장이 따로 있었고, 그들이 자기 부족을 다스렸답니다. 그런데 이들 부족장의 명칭이 돼지(豚), 개(狗), 양(羊), 말(馬), 소(牛)였다는군요. 그리고 중앙에 왕이 다스리는 지역이 따로 있었다고 합니다. 이 때는 농경사회가 완전히 정착되지 않았으므로, 다섯 가축을 다섯 부족에게 나누어 주어서 그 가축들을 경쟁적으로 번식시키도록 했답니다. 이렇듯 각 부족이 기르는 가축이 토템 신앙으로 정착되면서 나온 놀이가 바로 ‘윷놀이’랍니다. 즉, ‘도’는 ‘돼지’이고 ‘개’는 그대로 ‘개’이며 ‘걸’은 ‘양’이고 ‘윷’은 ‘소’이며 ‘모’는 ‘말’을 상징합니다. 이를 ‘도’ ‘개’ ‘걸’ ‘윷’ ‘모’의 순으로 배열한 이유는, ‘달리는 속도’에 따른 것이라고 하는군요. 그러므로 ‘도’는 한 걸음씩을 가고, ‘개’는 두 걸음씩을 가며, ‘걸’은 세 걸음씩을 가고, ‘윷’은 네 걸음씩을 가며, ‘모’는 다섯 걸음씩을 가게 됩니다.

‘사물놀이’는 실외(室外)에서 하는 놀이입니다. 이 놀이는 ‘꽹과리’와 ‘징’과 ‘장구’와 ‘북’ 등의 네 가지 풍물로 연주하도록 짜여 있습니다. 원래 ‘사물’(四物)이란, 불교의식에 시용되던 악기인 ‘법고’(法鼓)와 ‘운판’(雲板)과 ‘목어’(木魚)와 ‘종’(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나 뒤에 불교의식의 반주로 쓰이는 ‘태평소’와 ‘징’과 ‘북’과 ‘목탁’을 가리키는 말로 전용되었다가 다시 걸립패가 두드리는 ‘꽹과리’와 ‘징’과 ‘장구’와 ‘북’을 나타내는 말로 바뀌어서 풍물에 주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이게 ‘사물놀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한 시기는, 1978년에 창단된 ‘사물놀이’라는 연주단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김재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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