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의 악기론

제57절, 빈모 '가'가 윗사람에게 삼가는 마음으로(역: 녹시 김 재 황)

시조시인 2022. 3. 30. 07:34

제57절 빈모 ‘가’가 윗사람에게 삼가는 마음으로

 賓牟賈起免席而請 曰夫武之備戒之已久 則旣聞命矣 敢問 遲之遲而又久何也(빈모가기면석이청 왈부무지비계지이구 칙기문명의 감문 지지지이우구하야).

 빈모 ‘가’가 윗사람에게 삼가는 마음으로 모시는 자리에서(면석) 일어나며 청하여 말했다. “무릇 ‘무악’(무적인 춤)에서 갖추고 조심함이 이미 오래인 것은 이미 가르침을 들었습니다.(문명) 감히 여쭙겠습니다. 이를(갖추고 조심함이 오래인 것) 굼뜨게 하고 또한 (춤이 시작됨에 이르러서도) 굼떠서 오래 걸림은 무엇 때문입니까?” (녹시 역)

 ‘시조’의 경우- <어느 한 사람이 윗사람에게 삼가는 마음으로 모시는 자리에서(면석) 일어나며 청하여 말했다. “무릇 ‘씩씩한 음률’(힘 있는 멋)에서 갖추고 조심함이 이미 오래인 것은 이미 가르침을 들었습니다.(문명) 감히 여쭙겠습니다. 이를(갖추고 조심함이 오래인 것) 굼뜨게 하고 또한 (멋이 시작됨에 이르러서도) 굼떠서 오래 걸림은 무엇 때문입니까?”>

[녹시 생각]
 고시조의 경우에는 ‘씩씩한 음률’이나 ‘힘 있는 멋’의 내용을 지닌 작품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그만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뜨거웠음을 나타내는 게 아니겠는가. 물론, 그 당시에는 외적의 침입이 잦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몇 작품을 보고자 한다.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성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 파람 큰 한 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이는, 김종서(金宗瑞: 1390~ 1453)의 작품이다. 김종서는 조선 초기의 정치가이다. 자(字)는 ‘국경’(國卿)이고 호(號)는 ‘절재’(節齋)이며 시호는 ‘충익’(忠翼)이라고 한다. 1405년에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급제한 후에 여러 관직을 거치고 1433년 함길도관찰사로 파견되어 7~8 년 동안 국경 확장에 큰 공을 세웠다. 학문과 지략에 무인적(武人的) 기상까지 지니고 우의정을 지냈으나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살해되었다.

장검을 빼어 들고 백두산에 올라 보니
대명 천지에 성진이 잠겼어라
언제나 남북풍진을 헤쳐 볼꼬 하노라. 

 이는, 남이(南怡 1441~ 1468)의 작품이다. 남이는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1460년 경진무거(庚辰武擧)에 급제하고 여러 무관직을 역임했으며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도 급제하였다고 한다.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에 참여하여 적개공신(敵愾功臣) 일등에 책봉되었으며 북벌 여진 토벌에 참여하여 군공을 받았고, 1468년 27세의 나이로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역모를 꾀한다는 모함으로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고 전한다.

십년 갈은 칼이 갑리에 우노매라
관산을 바라보며 때때로 만져 보니
장부의 위국공훈을 어느 때에 드리올고.

 이는, 김응하(金應河 1580~ 1619)의 작품이다. 김응하는 조선 광해군 때의 무장이며, 자(字)는 ‘경의’(景義)이고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25살 때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1619년 강홍립(姜弘立)의 부하로 명나라 장군 유정(劉綎)의 군사와 함께 건주위(建州衛) 정벌에 종군하였는데, 명나라 군사가 곤경에 빠짐으로써 ‘유정 장군’이 자살하자 그는 부하를 거느리고 버드나무 아래에서 분전하다가 전사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