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의 악기론

제61절, 너만이 아직 목야의 이야기를(역: 녹시 김 재 황)

시조시인 2022. 3. 31. 12:36

제61절 너만이 아직 목야의 이야기를

 且女獨未聞牧野之語乎 武王克殷反商 未及下車而封黃帝之後於薊 封帝堯之後於祝 封帝舜之後於陳 下車而封夏后氏之後於杞 投殷之後於宋 封王子比干之墓 釋箕子之囚 使之行商容而復其位 庶民弛政 庶士倍祿(차여독미문목야지어호 무왕극은반상 미급하차이봉황제지후어계 봉제요지후어축 봉제순지후어진 하차이봉하후씨지후어기 투은지후어송 봉왕자비간지묘 석기자지수 사지행상용이복기위 서민이정 서사배록).

 “또한, 너만이 이직 목야의 이야기(무왕이 목야에서 은나라를 쳐서 없앴을 때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가. 무왕이 은나라를 이기고 ‘상’으로 돌아오자 아직 수레에서 내리기 전에 ‘황제’의 후예를 ‘계’에 봉하고, ‘제요’의 후예를 ‘축’에 봉하며, ‘제순’의 후예를 ‘진’에 봉했다. 수레에서 내리고 나서 하후씨의 후예를 ‘기’에 봉하고, 은나라의 후예를 ‘송’으로 받아들였다. 왕자 비간의 무덤을 만들고 ‘기자’의 감금을 풀어 주었으며 그로 하여금 ‘상용’(은나라의 어진 신하)에게로 가서 그 지위를 회복하게 했다. 서민에게는 ‘정’(정치)을 늦추고 ‘서사’에게는 봉록을 갑절로 해주었다.” (녹시 역)

 ‘시조’의 경우- <“또한, 너만이 이직 목야의 이야기(씩씩한 시조 작가가 목야에서 옛 나라를 노래했을 때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가. 씩씩한 시조 작가가 옛 나라를 노래하고 서울로 돌아오자 아직 수레에서 내리기 전에 ‘신요(神謠)나 민요 또는 무녀의 노랫가락’과 ‘향가’나 ‘정읍사와 같은 6구체가(六句體歌)’ 및 ‘고려가요’ 등을 살폈다. 수레에서 내리고 나서 ’시조의 연원과 한시 영향설‘을 밝히고 시조와 한역시와의 관계’를 고찰하였다. ‘시조의 한시 원류설’에 대한 무덤을 만들고, ‘혈죽가’의 감금을 풀어 주었으며 그에게 옛 나라의 고을로 가서 그 지위를 회복하게 했다. 일반 사람에게는 조임을 늦추고 ‘시조를 짓는 선비’에게는 그 보람이 두 배가 되게 하였다.”>

[녹시 생각]
 여기에서 ‘혈죽가’를 한 번 짚어 보기로 한다. 2006년 7월 21일, 한국시조시인협회는 ‘현대시조 100주년 기념행사’를 성대히 치렀다. 그리고 매년 기념행사를 계속해 오고 있다. 이는, 1906년 7월 21일에 <대한매일신보>에 발표된 대구여사(大丘女史)의 ‘혈죽가’(血竹歌)로 비롯되었다. 다시 말해서 ‘현대시조의 효시작’이 바로 이 ‘혈죽가’라는 것이다. 발표된 ‘혈죽가’는 3수로 되어 있다고 보는데, 띄어쓰기가 되어 있지 않고 종장 끝 음보가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3행 배열로 띄어쓰기를 해서 그 음절을 기록했을 때는 시조의 골격이 드러난다. 다만, 종장 끝 음보의 생략이 거슬리기는 한다. 
 ‘효시’(嚆矢)란, 옛날 중국에서 개전(開戰)의 신호로 울음소리를 내는 살을 적진(敵陳)에 쏘았다는 고사(故事)에서 온 말이다. ‘온갖 사물이 나온, 맨 시초’를 일컫는다. 지금 이 ‘혈죽가’를, 현대시조의 ‘효시작’이라고도 하고 ‘효시작’이 아니라고도 한다. 뭐든지 이렇게 볼 수도 있고 저렇게 볼 수도 있는 일이니, 이제는 ‘혈죽가’의 감금을 풀어 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