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런한 시조 120

녹색시인 녹색시조(18)

숲 아침 김 재 황 산새들 잰 울음에 단풍잎이 젖어 있다, 멀찍이 기지개를 몰고 가는 산 메아리 간밤엔 산마루 너머 풍악 소리 잦더니. 이슬로 눈물 빚는 별자리를 짚어 보면 들리듯 고운 음성 긴 빛으로 내려앉고 잎사귀 사이사이에 하늘 보는 뭇 얼굴. 문 열린 골짝마다 물소리를 묻는 샘터 고뇌도 산과의 맛 깊은 열륜 새겼어도 먼동이 일군 고요에 불이 붙는 갈채여. [시작 메모] 시조 작품 ‘숲 아침’은 나와는 특별한 인연을 지니고 있다. 1983년 정초, 조선일보 신춘문예 최종심에 들었던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심사평은 이태극(李泰極) 박사님이 쓰셨는데, 최종심에 들은 작품들을 언급하신 후에 “전반적으로 작품들이 향상되어 있었음은 기쁜 현상이라고 보겠다.”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리고 등단 직후에 ..

가지런한 시조 2022.01.21

녹색시인 녹색시조(17)

목멱산을 오르며 김 재 황 몸보다 마음으로 더딘 걸음 옮겨 가면 멀찍이 도는 둘레 가벼운 길 나타나고 빛 붉게 팥배나무가 더운 열매 그린다. 잎들도 물이 드니 사람마다 입 벌리고 다람쥐 한 마리가 바쁜 손을 놀리는데 피 묻은 담쟁이덩굴 험한 바위 오른다. 어디쯤 봉수대가 퀭한 눈을 뜨고 있나 언덕에 오른 솔은 근심으로 등이 굽고 더 높이 서울타워만 긴 발돋움 지닌다. [시작 메모] 알다시피, ‘목멱산’(木覓山)은 예전에 서울의 ‘남산’을 이르던 말이다. 높이는 265.2 미터인데 대부분이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북쪽에는 북악산이 있고, 동쪽에는 낙산(駱山)이 있으며, 서쪽에는 인왕산(仁旺山)이 있다. 조선 태조가 한양(漢陽)을 도읍으로 정하였을 때 ‘목멱산’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안산’(案山) 겸 ‘주작..

가지런한 시조 2022.01.20

녹색시인 녹색시조(16)

오! 저 단풍 김 재 황 내보인 네 숨결이 어찌 그리 고운 건가 뜨거운 그 빛깔에 절로 마냥 눈 적시며 온 가슴 모두 내주는 이 가을을 맞는다. 나무도 겨울 앞에 외짝 날개 펴는 건지 서늘히 바람 불면 날린 옷깃 여며 가듯 잎들이 두 눈 못 뜨게 울긋불긋 물든다. 떠나는 이들 모두 긴 발자국 두고 가니 숲과 숲 놓인 곳에 아픔 자락 쓸리는데 하얗게 눈 내릴 때는 잡아 봐야 모른다. [시작 메모] 단풍이 드는 원리는 어떤 것인가. 잎 속에 잎파랑이가 없어지고 그 대신으로 꽃파랑이가 나타나게 되면 단풍이 들게 된다. 즉, 화청소(花靑素)인 ‘안토시안’(anthocyan)이라는 붉은 색소가 쌀쌀한 가을이 되면 새로 합성된다. 아무튼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잎들을 보면서 나는 내 자신을 생각하게 된다. 누구..

가지런한 시조 2022.01.19

녹색시인 녹색시조(15)

거제수나무 김 재 황 깊숙한 산골 숲에 물소리로 일어서서 바람을 따라가듯 처음 일을 가늠하고 깃발이 내건 몸짓에 녹음으로 사느니. 소매를 스쳤는데 정이 드는 잎사귀들 마음은 둥글지만 맺고 끊듯 날카롭고 선명히 내보인 뜻이 맥박으로 뛰느니. 물오른 한낮에는 몸단장을 다시 하고 나서긴 하였으나 안타깝게 지닌 사연 가슴에 새긴 글자를 되새기며 가느니. [시작 메모] 거제수나무는 자작나무과 식물로 갈잎큰키나무이다. 지리산과 중부 이북의 높은 산에서 많이 자란다. 곡우(穀雨)가 되면 이 나무의 줄기 속을 지나가는 물이 많아진다. 그 때 줄기에 자국을 내면 수액이 줄줄 흘러나온다. 단맛이 조금 나는데, 이 물을 받아 마시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즉, 처음에는 그 이름이 ..

가지런한 시조 2022.01.18

녹색시인 녹색시조(14)

억새 동산 김 재 황 얽히는 마음이라 풀고 나면 높아지고 푸름을 따라가서 비질하는 가을 언덕 쓸고서 다시 닦으면 하룻날이 열린다. 배고픈 새들이야 쪼았으나 아침 자락 몸으로 비비다가 해를 멀리 밀었는지 웃으며 이야기해도 흰 머리가 날린다. 물빛은 일찌감치 들 밖으로 떠났는데 잎들이 꼿꼿하게 일어서서 찌른 거기 놀라니 구름 살결이 서산으로 쏠린다. [시작 메모] 볏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이다. 햇빛이 잘 드는 자리에 큰 무리를 이루고 산다. ‘억새’라는 이름에서 ‘새’는 ‘띠나 억새 따위의 볏과 식물을 총칭하는 말’이다. 그러면 ‘억’이란 말이 왜 붙었을까? 내 생각에는, ‘결심한 바(높은 곳에 터를 잡는 것)를 이루려는 뜻이 굳고 세차다.’라는 뜻의 ‘억세다’에서 ‘억’이 오지 않았나 싶다. 나는 ‘하늘공..

가지런한 시조 2022.01.17

녹색시인 녹색시조(13)

동학사에서 김 재 황 골짜기 가린 숲에 머문 새는 멀어지고 꿈결에 뒤척이면 솔 냄새가 이는 바람 천수경 외는 소리만 기둥 위로 감긴다. 어둠을 밝혀 가는 믿음이 곧 하늘이라 구름은 문을 열어 저승까지 환한 달빛 관세음 젖은 눈길이 고운 미소 남긴다. 그림자 끌던 탑이 별자리에 앉고 나면 버려서 얻은 뜻은 산 마음을 따라가고 숙모전 가려운 뜰도 물빛 품에 담긴다. [시작 메모] 동학사(東鶴寺)는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계룡산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 신라의 승려 ‘상원’(上願)이 창건한 사찰이라고 한다. 이 절의 동쪽에 학 모양의 바위가 있어서 그 이름을 얻었다는 설이 있다. 1864년 봄에 금강산에 있던 ‘만화 보선’(萬化 普善)이 이 절에 와서 옛 건물을 모두 헐고 건물 40칸과 초혼각 2칸을 지었는데 ..

가지런한 시조 2022.01.16

녹색시인 녹색시조(12)

히말라야를 오르며 김 재 황 너무나 숨이 차다 홀로 가는 내 발걸음 지나온 산길 위로 젖은 바람 또 눕는데 그 높은 나의 봉우리 하얀 눈이 빛난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빛 맑은 그 자리에 말없이 삶을 새긴 어느 설인 큰 발자국 아직껏 굽은 호 위에 빈 고요로 머문다. 볼수록 몸을 틀고 멀리 펼친 저 산줄기 새겨진 주름인 양 저물어 간 하늘 아래 감춰 온 나무 한 그루 늙어서야 꽃핀다. [시작 메모] 전업 문인으로 살아가는 내 길이 마치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가는 것 같다. 히말라야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맥으로 해발 7,300미터 이상의 높은 봉우리가 30여 개나 분포한다고 한다. 이 산지의 정상 부근은 언제나 눈으로 덮여 있다. 눈으로 덮인 곳을 신성하게 여기는 성지순례 등산가들이 이 산맥을 ‘히말라야’..

가지런한 시조 2022.01.15

녹색시인 녹색시조(11)

가시연꽃 이미지 김 재 황 손가락 깊이 걸며 두 맘 맞춘 보름날밤 둥글고 널따란데 임 안 오면 가시 방석 한낮에 빈 달 챙기듯 붉은 심지 돋운다. 어쩌면 저 잎마다 푸른 징이 될지 몰라 큰 채로 힘껏 쳐라 저 하늘이 울리도록 예쁜 임 깊은 잠에서 맑은 눈이 뜨이게. 귓가에 바짝 대고 싫지 않게 나눈 말들 임 가니 옷 누비듯 찔러 대는 바늘인가, 껴안고 아픔 참을 때 세운 불꽃 사윈다. [시작 메모] 수련과의 한해살이풀이다. 씨가 터서 나오는 잎은 화살 모양인데 작지만 그게 길둥글게 되었다가 점차 큰 잎이 나오기 시작하여 다 자라면 둥글게 되고 양면 잎맥 위에 가시가 돋는다. 그리고 여름에 잎 사이에서 가시가 돋은 꽃줄기가 길게 나와서 자줏빛 꽃이 피는데 낮에는 벌어졌다가 밤에는 닫힌다. 열매는 장과로 늦..

가지런한 시조 2022.01.14

녹색시인 녹색시조(10)

달맞이꽃 연서 김 재 황 저무는 저 하늘엔 그리움이 담겨 있고 꿈길로 이 냇물은 어서 가자 이끄는데 더위를 식히고 나서 내 연필을 듭니다. 아직은 달도 없이 높게 뜨는 뭉게구름 어디로 가는 건지 서두르는 바람 걸음 낱낱이 보내고 싶은 내 소식을 씁니다. 까맣게 닫힌 밤이 호수처럼 문을 열면 마침내 웃음 물고 동그랗게 뜨는 얼굴 새에게 꼼꼼히 접은 내 편지를 줍니다. [시작 메모] 여름이면 줄기 위쪽으로 지름이 2~3 센티미터쯤 되는 황색 꽃이 잎겨드랑이에 오륙 개 정도가 모여 피는데, 해가 질 무렵에 피었다가 아침에는 시들어 버리기 때문에 ‘달맞이꽃’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남미 칠레가 원산으로 바늘꽃과에 딸린 두해살이풀이다. 한자로는 ‘월견초’(月見草)이다. 약초로도 쓰는데 생약 이름으로는 ‘월하향’(月..

가지런한 시조 2022.01.13

녹색시인 녹색시조(9)

나무가 그리다 김 재 황 하늘을 바라보면 가장 엷은 비늘구름 봄날에 촉촉하게 가랑비 꿈 적시는데 앞가슴 활짝 펼치고 달마중을 그린다. 뒷산을 딛고 서면 날아드는 멧비둘기 고향은 어디만큼 짙은 그늘 내리는지 실뿌리 길게 늘이고 나들이를 그린다. 들녘을 더듬으면 어디선가 바람 소리 서둘러 달려와서 또 어디로 떠나는가, 윗가지 더욱 올리고 속마음을 그린다. [시작 메모] 늘 느끼는 일이지만 나무가 살아가는 모습이 참으로 경이로울 때가 많다. 나이가 많은 나무일수록 베풂이 높다. 노자 제38장 보면, ‘상덕부덕 시이유덕. 하덕불실덕 시이무덕’(上德不德 是以有德 下德不失德 是以無德)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높은 베풂은 베풂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베풂이 있다. 낮은 베풂은 베풂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 ..

가지런한 시조 2022.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