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 30편) 23. 눈 내리는 날 눈 내리는 날 김 재 황 비워도 무거운 가지에는 어둠이 밤새도록 친친 감기고 푸른 숨결 의지한 하늘에서 우수수 우수수 별들이 떨어진다. 살기는, 산바람 힘겹게 넘는 외진 산골짝 가파른 땅 산 뒤에 또 산을 두르고 하루하루 엮어 가는 나무들의 꿈 그래도 오늘은 눈이 내린다. 날리는 눈발 속에 새로.. 시 2009.06.13
(다시 시 30편) 22. 소나기 연가 소나기 연가 김 재 황 마당에 대나무 숲이 일어선다. 빈 가지마다 옛 이야기는 젖어들고 그리운 얼굴들이 죽순처럼 돋아난다. 번쩍번쩍 치는 번개를 따라 우르르 쾅쾅 우는 천둥소리에 어둠 속에 갇혔던 댓잎들이 풀려난다. 까닭 없이 맹꽁이는 왜 그리 울고 보릿고개는 어찌 그리 구불거렸던지 장끼 .. 시 2009.06.12
(다시 시 30편) 21. 겨울 산을 오르면 겨울 산을 오르면 김 재 황 거기, 고요가 살고 있다. 해묵은 기침 소리 모두 잠재우고 두툼한 햇솜이불 넓게 깔아놓고 하얀 숨결이 날개를 접고 있다. 낮아서 더욱 아늑한 자리 시린 바람 불어서 한껏 자유로운 곳 안 말해도 알아듣고 만지지 않아도 느껴지는 그분의 결코 늙지 않는 사랑 졸고 있는 산.. 시 2009.06.10
(다시 시 30편) 20. 고요한 길 고요한 길 김 재 황 보이지 않는 길은 고요하다. 똑바로 뻗은 길이 소리 없이 하늘 위로 향한다. 눈감고 입 다물고 홀로 걸어가는 길 너무 적막하여 나무들도 푸른 속잎을 밟고 간다. 시 2009.06.08
(다시 시 30편) 19. 떠돌이 악사 떠돌이 악사 김 재 황 애써 인도로 가지 않아도 산달 깊숙이 들어가면 스스로 고행을 즐기고 있는 목숨 하나 만날 수 있다. 불꽃을 머리에 이고 온 몸에 가시를 두른 수도승 같은. 어쩌면 이 풀은 전생에 인도의 오지를 사랑한 유랑객이었으리. 맨발에 악기 하나 껴안고 서러운 땅을 떠돌던 악사였으리... 시 2009.06.07
(다시 시 30편) 18. 오늘 하루는 오늘 하루는 김 재 황 내가 지금까지 손에 들고 놓지 못한 만년필 나무에게 맡겨 놓은 채 바람의 길을 밟겠다. 이 나이에 이를 때까지 한 번도 닿아 보지 못한 곳 나무와 함께 걸으며 멋지게 휘파람을 불겠다. 시 2009.06.06
(다시 시 30편) 17. 손 씻은 하늘 손 씻은 하늘 김 재 황 바위의 움푹 팬 자리에 빗물이 고여 있고, 늙은 소나무가 고달픈 그림자를 뻗어서 그 물에 손을 씻는다. 세상을 안은 눈빛이 잔잔하다. 내 호기심이 소나무께로 다가가서 그 그림자의 손을 잡아당기자, 산의 뿌리까지 힘없이 딸려 올라오고 빈 하늘만 몸을 떤다. 시 2009.06.05
(다시 시 30편) 16. 길은 그대로 길은 그대로 김 재 황 급히 산길을 오르다가 나무의 길게 뻗은 다리에 걸려서 넘어진다. 나무가 껄껄 웃는다. 왜 그리 허둥거렸을까. 산도 산길도 그 자리에 그리 있는데, 갈 길도 정해져 있는데 나무가 쯧쯧 혀를 찬다. 시 2009.06.04
(다시 시 30편) 15. 설설 물이 끓고 설설 물이 끓고 김 재 황 겉으로 주전자는 점잖다. 그러나 붉은 혓바닥이 슬슬 네 엉덩이를 간질이면 참지 못하고, 마음이 끓기 시작한다. 센 콧김이 밖으로 ‘식식’ 쏟아져 나오고 뚜껑마저 들썩들썩 장단을 맞춘다. 한밤 내내 가라앉아 있던 부드러움이 놀라 깨어나서 몸을 뒤집으며 용솟음친다. 무.. 시 2009.06.02
(다시 시 30편) 14. 맑은 눈동자 맑은 눈동자 김 재 황 이 세상에서 가장 맑은 건 들꽃의 눈동자 이는, 천성으로 그렇다기보다도 태어나면서 맨 처음 새벽하늘을 보았기 때문이다. 들꽃과 눈이 마주치면 어린 샘물의 옹알이가 들린다. 시 2009.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