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8 위대한 화음 김 재 황 잎들이 피리 소리를 낸다 댓잎이 좁은 소리를 지녔는가 하면 떡갈잎은 넓은 소리를 지녔고 미루나무 꼭대기의 어린잎이 높은 음성을 내는 반면에 땅에 구르는 가랑잎은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음성을 낸다 솔잎 소리는 있는 듯 없는 듯 잎들이 모여서 이어 가는 자연의 가락 바람.. 시 2005.10.30
시7 클린 벤치 ―木詩 85 김 재 황 바람이 걸러져서 불어오는 곳 그래서 무균 상태인 곳 클린 벤치의 내부처럼 깨끗한 숲속 나는 이 곳으로 시를 쓰려고 왔다 순수 그대로 싹이 날 수 있게 내 손도 소독하고 그저 가슴에 간직한 말을 꺼내면 된다 시 2005.10.29
시6 대작하다 ―草詩․20 김 재 황 달이 몸살나게 떠오른다 친구는 먼 데 있고, 뜰에 나가 쇠비름 옆에 앉는다 너무나 적적하여 술 한 잔을 그에게 따라 준다 권커니 작커니 밤은 자꾸 깊어 간다 마침내 어둠이 비틀거린다 내가 취했나 그가 취했나 달까지 몽롱하게 멀어진다 시 2005.10.28
시5 혈 서 김 재 황 세상을 더듬던 손가락 끝 가장 가려운 살점 베어낸 자리에서 전신의 아픔보다 더한 꽃이 핀다 그늘진 쪽에 서서 몇 줌 스며든 햇빛에 눈멀지 않고 오직 순수하게 펼친 무명 위에 뜨거운 마음을 적는 아, 속으로 불붙는 나무의 모습 찬 바람에 붉은 꽃이 진다 빛나던 자리에 하나 둘 피가 .. 시 2005.09.14
시4 소나기 목욕 김 재 황 세찬 빗발 속에 서 있는 플라타너스를 보고 있자니 어릴 적에 버짐 핀 얼굴로 ‘소나기 목욕’을 하던 일이 떠오르네 벌거벗고 마당 한가운데로 나가 그저 서 있기만 하면 소나기가 알아서 몸을 다 씻겨 주었지 우리는 간지러움에 낄낄거렸네 저 플라타너스도 그때 그 재미 알고 .. 시 2005.09.13
시3 꿈꾸는 길 김 재 황 착하게 그림자를 접으면 품에 안긴 것처럼 편안하다 나무는 달빛 아래에서 달팽이와 나란히 잠든다 바람 소리를 베개 삼아 서서도 눕고 누워서도 서며 저절로 흐르는 길을 꿈꾼다 세상에서 가장 적막한 밤에 큰 너그러움의 나라에 닿는다. 시 2005.09.06
시2 달빛 아래에서 김 재 황 금강산과 손이 닿아 있는 성대리 언덕으로 달빛이 너무 많이 쏟아져서 길이 끊겼다 어둠을 밟고 걸어가야 할 이 땅의 바쁜 사람들 우거진 풀숲처럼 서로 얽히어서 얕은 잠에 빠질 때 그는 달빛 아래에서 꽃을 빚으려고 몸을 살랐다 길을 이으려고 시를 썼다. (시작 노트) 고성군.. 시 2005.08.31
너와집처럼 너와집처럼 김 재 황 달빛이 너무 밝아 뒷산으로 시를 쓰려고 와서 앉았는데 내 원고지 위에 앞산 억새의 가늘고 긴 그림자가 찾아와서 글씨를 쓰고 좀처럼 시는 몸을 드러내지 않는다 깊은 숲 속에 자리잡고 앉은 너와집처럼. (시작 노트) ‘너와집’이란 ‘너새집’의 변한 말이다. 그리고 ‘너새’.. 시 2005.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