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선시 30편) 24. 소나기 목욕 소나기 목욕 김 재 황 세찬 빗발 속에 서 있는 플라타너스를 보고 있자니 어릴 적에 버짐 핀 얼굴로 ‘소나기 목욕’을 하던 일이 떠오르네. 벌거벗고 마당 한가운데로 나가 그저 서 있기만 하면 소나기가 알아서 몸을 다 씻겨 주었지 우리는 간지러움에 낄낄거렸네. 저 플라타너스도 그때 그 재미 알.. 시 2008.10.19
(자선시 30편) 23. 함께 거니는 이 함께 거니는 이 김 재 황 눈이 내리는 날을 골라서 홀로 산으로 간다. 쌓인 눈 속에 고요가 작은 떡잎을 조용히 내밀고 있는 곳 잠들지 않고 서 있는 키 큰 먼나무 곁으로 간다. 흰 옷을 몸에 걸치고 먼나무와 ��께 거니는 이는 누구인지 나는 서둘러 산을 오르지만 그는 이미 가고 없다. 시 2008.10.18
(자선시 30편) 22. 지팡이 지팡이 김 재 황 네 걸음은 구름처럼 가벼웠다. 길이 멀고 험할수록 너는 나보다 한 발짝 앞에서 이 땅의 시린 가슴 조심스레 두드려 가며 산을 만나면 산을 넘고 강과 마주치면 강을 건넜다. 그래도 내 젊음이란 천방지축이어서 내민 네 손길 뿌리치고 저만치 홀로 달려가 보기도 했었지만, 결국 작은 .. 시 2008.10.17
(자선시 30편) 21. 노고지리 노고지리 김 재 황 따사로운 눈길 주시니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아지랑이 타고 하늘 가까이로 올라가서 한껏 운다. 그 가슴에 얼굴 파묻고 운다. 겨우내 올린 기도가 얼마나 밤하늘을 수놓았던가. 마침내 그분이 눈길 여시니 골짜기마다 얼음 풀리고, 비었던 들판마다 가득한 숨결 소리 마냥 즐거워서.. 시 2008.10.15
(자선시 30편) 20. 못생긴 모과 못생긴 모과 김 재 황 너는 민주주의를 신봉하였다. 나는 무심코 네 옆을 스쳐 갔고 너는 길거리 좌판 위에서 자유롭게 뒹굴면서 지내었다. 한 떼의 젊은이들이 길거리에서 민주주의를 목청 높여 외칠 때에도 너는 생긴 대로 그렇게 놓여 있었다. 나는 그러한 평화가 보기에 좋아서 걸음을 멈추고 손을.. 시 2008.10.14
(자선시 30편) 19. 물빛 눈으로 물빛 눈으로 김 재 황 나무의 눈은 잎에 머문다. 바람에 흔들리는 많은 잎들이 하늘을 보고 산을 보고 나를 본다. 나무와 눈길이 마주치자, 단번에 내 몸이 젖는다. 하지만 나무의 눈은 너무 멀다. 그 안에 비치는 별빛들이 나를 바라보며 하얗게 웃는다. 시 2008.10.13
(자선시 30편) 18. 너와집처럼 너와집처럼 김 재 황 달빛이 너무 밝아 뒷산으로 시를 쓰려고 와서 앉았는데 내 원고지 위에 앞산 억새의 가늘고 긴 그림자가 찾아와서 글씨를 쓰고 좀처럼 시는 몸을 드러내지 않는다. 깊은 숲속에 자리잡고 앉은 너와집처럼. 시 2008.10.12
(자선시 30편) 17. 우주음악 우주 음악 김 재 황 뜨거운 태양이 이제 풀의 머리 위를 지나가 버리고 바람도 쓸쓸히 떠나고 마지막으로 세상도 어둠에 묻히고 모두가 가 버린 지금 위대한 입술이 풀잎을 위하여 부는 피리 소리 떨리는 느낌으로 외롭게 만나는 우주 음악 내가 풀숲 곁을 걸어가고 내 마음이 풀잎 속으로 들어가고 산.. 시 2008.10.11
(자선시 30편) 16. 시 읽으러 시 읽으러 김 재 황 내가 들에서 데려다가 남몰래 가꾸어 온 마음 속의 작은 풀 한 포기 어느 틈에 다 자라서 꽃을 피웠는가. 가슴을 열자, 먼 곳에서 나비 한 마리 내 시 읽으러 나풀나풀 날아온다. 시 2008.10.10
(자선시 30편) 15. 위대한 화음 위대한 화음 김 재 황 잎들이 피리 소리를 낸다. 댓잎이 좁은 소리를 지녔는가 하면 오동잎은 넓은 소리를 지녔고, 미루나무 꼭대기의 어린잎이 높은 음성을 내는 반면에 땅바닥에서 구르는 가랑잎은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음성을 낸다. 솔잎 소리는 있는 듯 없는 듯 잎들이 모여서 이어 가는 자연의 .. 시 2008.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