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려고 했다
김 재 황
나는 초등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그 당시에는 원하는 중학교를 시험을 치르고 입학하였는데, 담임선생님께서는 용산중학교를 추천하셨다. 그러나 어머니께서는 은행원이 되는 게 좋다고 하시며 적극적으로 선린중학교에 시험을 치르라고 하셨다.
나는 어머니의 말씀에 따라 선린중학교에 시험을 치르고 입학하였다. 아버지께서는 기뻐하시며 나를 ‘화신백화점’으로 데리고 가셔서 만년필을 사 주셨고, 점심으로 그 지하의 일식집에서 ‘새우튀김백반’을 한턱 내셨다. 너무나 황송하여 그 일을 지금도 못 잊는다.
선린중학교는 좋은 학교였다. 그 곳에서 주산이나 부기 등을 배웠으며, 같은 반의 친구들도 모두 훌륭했다. 주산은 남들이 하는 만큼은 지금도 할 수 있으나 암산은 많이 퇴색하였다. 그 반면에 부기의 ‘대차대조표’나 ‘정산표’ 등을 지금도 작성할 자신이 있다.
특히 선린중학교는 ‘야구’로 이름을 날렸다. 그래서 어깨가 으쓱하여 야구 응원을 많이 다녔다. 그 덕분으로 야구에 대한 지식도 어느 정도는 알게 되었다. 한 마디로 선린중학교는 ‘중학교 야구’의 명문이었다.
나는 중학교를 흑석동에서 다니다가 신문로2가에서 다니게 되었다. 아버지께서 그 곳에 2층 목조건물을 지으셨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곳에서 전차를 타고 선린중학교를 다녔다. 신문로2가의 우리 집의 뒤에는 서울중학교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 가까운 곳에 중학교를 두고, 먼 곳의 중학교를 다녔으니---그게 모두 인연이 아니겠는가. 하기는, 서울중학교는 명문 중학교라 수재들이 다녔기에 나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그렇듯 장거리 통학으로 중학교를 졸업하게 되었을 때, 나를 비롯한 3명의 선린중학교 친구들이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려고 특차인 서울사범고등학교에 입시원서를 냈다. 1차 필기시험에는 3명 모두가 합격하였으나, 나는 실기시험에 자신이 없어서 다시 배재고등학교에 입학시험을 치르고 들어가게 되었다.
다 알고 있듯이, 배재고등학교는 5대 사립학교 중 하나이다. 게다가 그 당시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살아 있었기에 더욱 전도가 밝았다. 학교에 교목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성경을 가르치고 시험도 보았다. 물론, 일주일에 한 번, 예배시간도 있었다. 또, ‘유도’도 의무적으로 배워야 하였고 실제로 시합을 통하여 점수도 받았다. 슬쩍슬쩍 유도 선생님의 눈을 피하여 넘기고 또 넘기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래서 모든 학생들이 좋은 점수를 받았다.
특별활동으로 나는 ‘수영반’을 택했다. 주로 한강으로 나가서 연습을 했는데, 한강을 건너다니기는 다반사였다. 그래서인지, 그 때의 내 몸매는 그런 대로 보기에 괜찮았다.
배재고등학교 3학년 때에 4.19가 일어났다. 그 날, 양정고등학교 학생들이 교문 앞으로 와서 대모에 가담하라고 외쳤으나, 선생님들이 어찌나 완강히 교실문과 대문을 막으시는지, 우리는 대모에 가담하지 못했다. 그 일로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를 하고 외국으로 떠났다. 그 후로 4.19 이야기만 나오면, 나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교회를 다녔다. 성가대의 일원으로 교회에서 노래도 불렀다. 그러나 큰 믿음은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어디에 예속되기를 싫어했다. 자유인으로 남기를 늘 갈구했다. 특히 ‘시’를 좋아해서 밤이 새도록 손에 집히는 대로 시집을 독파했다. 그러니 학업성적은 말이 아니었다.
2학기가 되어서야 정신이 들었다. 대학입시가 바로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으니 어쩌겠는가. 나는 영어와 수학 참고서를 몇 권씩 사다가 밤을 새며 독파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기자, 대학의 학과를 어느 곳으로 정할까를 두고 고심했다. 내가 가고자 한 학과는 ‘국문과’와 ‘농학과’였는데, 심훈의 소설 ‘상록수’를 읽고 농촌으로 가서 주인공과 같은 삶을 살기 위해 ‘농학과’로 진로를 정했다.
'회상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꼬마들 (0) | 2018.01.14 |
---|---|
조지훈 시인을 스승으로 삼다 (0) | 2008.08.03 |
내 마음이 항상 편하게 머무는 곳 (0) | 2008.07.27 |
내 삶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 (0) | 2008.07.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