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기

내 마음이 항상 편하게 머무는 곳

시조시인 2008. 7. 27. 15:27
 

                                           내 마음이 항상 편하게 머무는 곳


                                                            김 재 황


 내 고향은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임진면 임진리이다. 곁에 임진강이 흐르고 있는 곳이다. 더 알기 쉽게 말하면 ‘임진나루’가 있는 부근이다. 그 언덕 위에 ‘화석정’이 지금도 서 있다. 이곳에서는 무엇보다도 ‘참게’가 유명하였다. 옛날에는 이 ‘참게’를 임금님에게 진상하였다니,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더욱이 임진강에는 물고기가 많았다. 뱀장어를 비롯하여 잉어와 붕어들이 많았다. 한 마디로 ‘물 반. 고기 반’이라고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고향에서 태어나지 못했다. 내가 태어난 곳은 만주의 ‘봉천’이라는 곳이었다. ‘봉천’은 지금의 ‘심양’이다. 나는 내가 태어날 시기와 장소를 선택할 수 없다. 그 일은 오직 부모님에게 달려 있다. 그러니 내가 ‘봉천’, 아니 ‘심양’에서 태어나게 된 이유는 부모님에게 물어야 한다.

 내가 듣기로, 아버지는 일찍 할아버지를 여의시고 할머니 밑에서 자라셨단다. 위로 누나 한 분과 형이 두 분 계셨다고 한다. 젊어서 홀로 되신 할머니께서 네 명의 자녀를 키우셨다. 그러니 그 어려움이 얼마나 컸을까는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그래서 막내이신 아버지는 할머니에 대한 더욱 큰 그리움을 지니고 계셨다.

 책을 좋아하신 아버지는 소년 시절에 책방에서 점원으로 일을 하셨다는데, 그 당시는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에 일본군으로 강제 징집당하셨다. 운명이랄까? 그리곤 일본군의 졸병이 되어 만주까지 끌려가셨다. 그 때, 문제가 생겼단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아버지는 고분고분한 성격이 아니셨다. 그 때문에, 상관이랍시고 한두 계급 높은 일본인 병사들이 아버지를 몹시 괴롭혔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복수할 생각으로, 어느 날 아버지는 일본군 하사관 시험에 응시하셨다. 그렇게 아버지는 일본군 하사관이 되셨다. 그 당시에는 ‘오장’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얼마 후, 아버지는 잠깐 서울에 다니러 왔다가 친구의 누이동생인 어머니를 만났고, 어머니와 결혼을 하기 위해 군대에서 퇴역한 후에 군속이 되셨다. 아버지는 외할머니에게 결혼을 승낙받기 위해 그 어려운 때에 ‘바나나’까지 선물하셨다니 그 정성이 놀랄 만하다. 그렇기도 했을 게, 아버지는 결혼 후에 어머니를 만주로 데려가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어머니와 결혼한 후에 만주로 함께 가셨고 ‘봉천’, 아니 ‘심양’에서 나를 낳으셨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자, 나는 부모님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서울로 돌아왔다. 너무 어렸을 때이기에 ‘심양’에 대한 기억은 아무것도 없다.

 서울로 돌아온 후, 동생이 셋이 생겼을 때에 나는 죽을 고비를 넘겼다. 내 밑으로 여동생이 둘이고 남동생이 하나였는데, 그 넷이 모두 홍역에 걸렸다. 어찌나 열이 나는지 저승의 문턱을 오락가락하였다. 영혼이 빙빙 돌면서 천장에 붙어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저 아래 까마득하게 내 육신이 내려다보였다. 얼마 동안을 그리 앓다가 조금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조그만 관에 누운 채로 고모부의 등에 업혀 나가는 동생들을 보았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두 명은 죽고 두 명은 살아남았다. 그 때 잃은, 셋째는 속눈썹이 길고 재롱둥이인 여동생이었고 넷째는 아주 덕성스럽게 생긴 남동생이었다. 지금도 어린 그 모습들이 가끔 눈앞에 떠오르곤 한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나는 고향에서 서당에 다닌 기억이 나기도 한다. 서당의 훈장 어른은 아주 엄하셨고 잘못한 아이들에게는 어김없이 회초리를 치셨다. 아마도 ‘천자문’을 배웠던 성싶은데, 그날 배운 대목을 빨리 외운 아이들은 빨리 귀가시키고 늦게 외운 아이들은 늦게 귀가시키셨다. 그래도 나는 비교적 빨리 나왔고 늦게 나오는 아이들을 기다리며 밖에서 시시덕거리곤 했다.

 그렇듯 개구쟁이 시절, 나는 아이들과 함께 옻나무를 흔들며 놀다가 옻이 오르는 바람에 또 한 번 죽을 고생을 했다. 어찌나  ‘옻’이 많이 올랐던지,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었다. 온 몸이 우툴두툴하게 부었다. 할머니는 ‘옻에는 닭고기 삶은 물이 좋다.’라는 말을 믿으시고 날마다 닭을 삶아서 그 물을 내 몸에 발라주셨다. 아, 그 냄새가 얼마나 역겨웠는지! 몇 날 며칠을 고생한 끝에 나는 살아남았다.

 이제 고향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묻혀 계신다. 그러니 해마다 몇 번은 다녀오게 된다. 산소에 들렀다가 화석정으로 가서 임진강을 바라보면 마냥 마음이 어려지는 듯싶다. 그러나 철조망에 막혀 있는 임진강이 안쓰럽기 이를 데 없다. 하루 빨리 통일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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