씬쿠러, 콩쯔 32

11. 너는 양을 아끼느냐? 나는 예를 아낀다/ 김 재 황

11 너는 양을 아끼느냐? 나는 예를 아낀다 공자의 여러 제자 중에서 ‘자공’은 세 번째로 손꼽히는 사람입니다. ‘자공’(子貢)의 성은 ‘단목’(端木)이고, 그 이름은 ‘사’(賜)입니다. 그래서 공자가 언제나 ‘사야!’라고 그를 불렀지요. 공자와 같은 노(魯)나라 사람이 아니고, 위(衛)나라 사람이었습니다. 공자보다는 31살이 아래였습니다. ‘안연’과는 한 살 차이였답니다. 물론, ‘자공’은 그의 자(字)입니다. ‘자공’은 죽고 난 다음, 739년인 당나라 때에 ‘려후’(黎侯)가 되었으며, 1009년인 송나라 때에 ‘려양공’(黎陽公)이 되었다가 ‘려공’(黎公)으로 추봉되었습니다. ‘자공’은 말재주에 능한 사람이었고 지극히 총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재주도 많이 지니고 있었답니다. 공자는 항상 그가 말이 많음..

씬쿠러, 콩쯔 2022.01.24

10.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라/ 김 재 황

10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라 공자의 여러 제자 중에 ‘안연’을 ‘오른팔’이라고 말한다면 ‘왼팔’은 당연히 ‘자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로’(子路)는 성이 ‘중’(仲)이고 이름이 ‘유’(由)입니다. 그래서 공자가 ‘자로’를 언제나 ‘유야!’라고 불렀습니다. ‘자로’는 바로 그의 자(字)입니다. ‘자로’는 공자보다 9살이 아래였답니다. 그는 노나라 ‘변’(卞) 지방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의 산동성 사수현(泗水縣) 천림(泉林)이라고 합니다. 그는 사후 739년에 ‘위후’(衛候)가 되었고, 1009년인 송나라 때에는 ‘하내후’(河內候)가 되었으며, 그 뒤에 ‘위공’(衛公)으로 추봉되었습니다. ‘자로’는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하기에 그는 공자의 신변 보호를 자처했고, 언제나 스승의 뒤를 그림자처..

씬쿠러, 콩쯔 2022.01.23

9. 즐거움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김 재 황

9 즐거움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공자의 제자 중에 으뜸으로 치는 사람은 아무래도 ‘안연’(顔淵)일 듯합니다. 여러분은 공자의 어머니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요? 그렇습니다. ‘안징재’(顔徵在)입니다. 그러니까 어쩌면 이 ‘안연’이 공자의 외갓집 친척인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공자는 ‘안연’을 언제나 다정하게 ‘회’라고 불렀습니다. 이름이 ‘회’(回)입니다. 그래서 ‘안회’(顔回)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자’(字)는 ‘자연’(子淵)입니다. ‘안연’은 공자보다 나이가 30살이나 아래였고, 29세 때 이미 머리가 하얗게 세었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젊은 나이로 공자보다 먼저 세상을 훌쩍 떠나고 말았답니다. 그 후, 사람들은 그를 존칭해서 ‘안자’(顔子)라고도 했지요. 이는, 다름 아닌 ‘안 선생님’이라는 뜻이지..

씬쿠러, 콩쯔 2022.01.22

8. 슬퍼하되, 상하기에 이르면 안 된다/ 김 재 황

8 슬퍼하되, 상하기에 이르면 안 된다 노래는 살아가는 데 참으로 필요합니다. 우리의 기분을 힘차게 일으키는 힘이 노래에 있습니다. 밭에서 힘든 일을 할 때에도 노래를 흥얼거리면 절로 힘이 막 솟아납니다. 그뿐만이 아니지요. 노래를 자주 들으면 마음이 맑아지고 착해지는 듯도 합니다. 공자도 노래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압니까? 좋아했어도 아주 좋아했지요. 그 점잖은 공자가 노래를 그토록 좋아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고요? 이제부터는 믿기 바랍니다. 그 당시에도 여러 나라마다 유행하는 노래들이 많이 있었답니다. ‘민요’(民謠)입니다. ‘민요’란, ‘민중 속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여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는, 민중의 생활감정이 소박하게 담긴 노래를 통틀어서 이르는 말’입니다. 공자가 노래를 얼마나 좋아했는지에 대한..

씬쿠러, 콩쯔 2022.01.21

7. 어려운 일을 남보다 먼저 하라/ 김 재 황

7 어려운 일을 남보다 먼저 하라 공자의 가장 큰 가르침은 무엇이었을까요? 다름 아닌, ‘인’(仁)이었습니다. 그래서 국어사전을 먼저 펼쳐 보았지요. 거기에는 ‘타고난 어진 마음씨와 자애(慈愛)의 정을 바탕으로 하여 자기를 완성하는 덕(德)’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얼른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나는 어느 책에서 ‘인’(仁)은, ‘윤리적(倫理的, ethical)이라기보다 감성적(感性的, feeling-oriented)이고, 감성적이라기보다 심미적(審美的, esthetical)이다.’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이를 한 마디로 줄여서 말하면, ‘심미적 감수성’(審美的 感受性, Aesthetic sensitivity)이라고 한답니다. 그러므로 ‘인’한 사람은 ..

씬쿠러, 콩쯔 2022.01.20

6. 남이 알아주지 않음을 근심하지 마라/ 김 재 황

6 남이 알아주지 않음을 근심하지 마라 어느 덧, 공자의 나이가 마흔 살이 되었습니다. 이는, 바로 공자가 말하는 ‘불혹’의 나이입니다. 그런데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에서 이 ‘불혹’(不惑)은 그저 ‘의혹이 없어진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 40대는 ‘황금기’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활기 있게 일할 시기이지요. 그러므로 주위의 여러 사람들로부터 귀에 솔깃한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됩니다. 그럴 때, 그런 달콤한 이야기에 현혹됨으로써 갈팡질팡할 경우도 생기게 마련입니다. 공자는 그걸 경계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이가 40살에 이르면 자신의 올바른 주장에 따라 흔들림이 없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더 나아가서 공자는, ‘나이가 사십이나 되어서 남에게 미움을 받는다면, 그 사람은 이미 볼 장을 다..

씬쿠러, 콩쯔 2022.01.19

5. 석 달 동안이나 고기 맛을 잃다/ 김 재 황

5 석 달 동안이나 고기 맛을 잃다 ‘구’(丘)의 나이가 29세였을 때입니다. 그는 ‘사양자’(師襄子)에게서 ‘고금’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고금’(鼓琴)이란, 두드리는 악기와 타는 악기, 즉 ‘음악’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사양자’는, ‘석경’(石磬)을 치는 악관을 이릅니다. ‘사양자’에서 ‘양’(襄)은 이름이고 ‘사’(師)는 악사(樂師)를 나타냅니다. 또, ‘석경’은, 아악기의 한 가지로, 돌로 만든 ‘경쇠’로서 소리가 아주 맑다고 합니다. 그런데 젊은이 ‘구’는 열흘 동안이나 배웠건만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답답하다고 여겼던지, ‘사양자’가 말했습니다. “그만큼 익혔으면, 새로운 것을 배우도록 하세.” 그 말에 ‘구’가 대답했습니다. “제가 ‘곡’은 벌써 익혔으나 아직 그 ‘수’를..

씬쿠러, 콩쯔 2022.01.18

4. 궁형을 당한 사내가 붓을 들다/ 김 재 황

4 궁형을 당한 사내가 붓을 들다 ‘논어’는,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에 그의 제자들이 모여서 ‘공자에 관한 말들’을 묶은 문집입니다. 후한 때에 ‘반고’(班固)가 지은 ‘한서’(漢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씌어져 있습니다. 공자가 그의 제자들과 당시의 여러 인사들 및 시인(時人)들에게 언행을 비롯하여 제자들이 서로 주고받은 말이나 공자에게서 들은 말들을 당시 제자들이 저마다 기록한 바가 있었다. 그런데 공자가 세상을 떠나자, 문인들이 그것들을 추려 모아서 의논하여 편찬하였다. 따라서 ‘논어’라고 한다.【한서 ‘문예지(文藝誌)】 ‘논어’는 원래 3종류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하나는, ‘노론’(魯論)이라는 ‘노나라의 논어’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제론’(齊論)이라는 ‘제나라의 논어’입니다. 그리고..

씬쿠러, 콩쯔 2022.01.18

3. 천하게 자라서 상스러운 일에 능하다/ 김 재 황

3 천하게 자라서 상스러운 일에 능하다 19살의 가장인 젊은이 ‘구’(丘)는, 노나라 권력자인 계씨 집안의 ‘창고지기’ 자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이를 ‘위리’(委吏)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창고를 관리하는 말단 관리라고 합니다. 아무튼 그는 열심히 일했지요. 그래서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칭찬했습니다. “‘구’는 참으로 마음이 바른 사람이야. 여느 ‘창고지기’ 치고 어느 한 사람 곡식 됫박쯤 속이지 않은 사람이 없건만, ‘구’는 쌀 한 톨 속이는 법이 없으니 말이야. 요즘 세상에 저런 사람 보기는 드물지.” 스물한 살이 되었을 때, ‘구’는 성실함을 인정받아서 조금 더 나은 자리로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대단한 일이 아니라, 제사 때에 바칠 짐승을 맡아서 기르는 일이었..

씬쿠러, 콩쯔 2022.01.17

2. 니구산 아래에서 태어나다/ 김 재 황

2 니구산 아래에서 태어나다 옛날, 중국의 춘추시대의 노(魯)나라에 키가 10척(尺)이나 되는 한 무인(武人)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이름을 ‘숙량흘’(叔梁紇)이라고 했습니다. 춘추시대(春秋時代)란, 그 당시에 날로 증가해 가는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새로운 영토가 필요했는데, 새 영토를 얻기 위해 이웃나라들끼리 끝없이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 ‘열국(列國) 사이에서 격렬한 항쟁이 거듭되던 시기’를 말합니다. 그런데 키가 10척이라면, 지금으로 계산하여 얼마나 될까요? 그 당시에는 8촌(寸)이 1척으로 되며, 이는 지금의 6촌(寸)2분(分)2리(厘)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숙량흘’의 키는 186센티미터 정도가 되었을 듯합니다. 그가 젊었을 때(노나라 양공 10년 봄, 기원전 563년)에 진(晉)나라가 그 세..

씬쿠러, 콩쯔 2022.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