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시조로써 시를 말하다/ 녹시 김 재 황

시조시인 2019. 10. 1. 22:37

시조로써 시를 말하다

- 한국 시문학의 나아갈 방향에 대하여

 

 

김 재 황

 

 

 

(1)

 

누가 나에게 물었다. “왜 날마다 시조를 짓느냐?”

나는 그에게 되물었다. “왜 당신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세수하고 하루에 세 번씩이나 밥을 먹느냐?”

그렇다. 나는 수신의 방편(方便 upāya)으로 시조를 짓는다. 시인은 어엿한 선비이니 날마다 수신(修身)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수신을 게으르게 한다면 어찌 문인의 길을 올바르게 걸어갈 수 있겠는가. 사서삼경 중 대학에는 자천자이지어서인 일시개이수신위본’(自天子以至於庶人 壹是皆以修身爲本)‘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하늘의 아들로부터 뭇 사람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다 함께 몸 닦음을 뿌리로 삼는다.”라는 뜻이다.

또 하나. 논어에 들어 있는 수많은 가르침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공자의 그 유명한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이다. 이 말은 더 나아가서, 시인은 시인다워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시인이 시인다워지려면 끊임없이 수신을 거듭해야 한다. 이게 바로 어짊’()에 머무르는 길이니 어찌 잠시라도 게으르게 할 수 있겠는가.

다시 또 하나. 수신의 방편이니, 시조는 참다워야 한다. 참되지 않고서는 수신이 될 수 없다. ‘참되다라는 말은 바르다라는 말이기도 하다. 논어(論語) 중에는 할부정 불식’(割不正 不食)이라는 문구가 들어 있다. 이는 공자의 일상을 가리키는 말인데, ‘반듯하게 썰지 않았으면 먹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수신으로 이루어진 마음

의 자세가 아닐 수 없다.

 

 

 

 

 

(2)

 

어차피 시조는 정형시이기에 바른 정형을 내보일 필요가 있다. 물론, 이는 내 생각일 뿐이고, 다른 사람도 이렇게 써야 한다고 강조하지 않는다. 모두가 알다시피, ‘라는 것은, 반드시 이렇게 써야 한다는 법도 없고, 반드시 이렇게 쓰지 말아야 한다는 법도 없다.

시조는 3612음보(소절)로 되어 있다. 그 짜임이 많은 변화를 일으킨다. 와룡선생(臥龍先生)팔진도(八陣圖)라는 말을 들어 보았는가? 아무것도 없이 다만 강변에 팔구십 돌무더기가 있을 뿐인데, 적장 육손이 들어섰다가 나오려고 할 때 돌연 일진광풍이 일어나면서 삽시간에 모래가 날고 돌이 구르면서 하늘땅이 캄캄해졌다. 그는, 공명의 장인 황승언의 도움을 받아서 목숨을 간신히 보전하였다. 그 지방 사람의 말을 빌리면 그 내막이 다음과 같다.

이곳은 어복포(魚腹浦)라는 곳인데 재갈공명이 서천(西川)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이곳에 와서 돌을 쌓음으로써 진()을 친 곳이올시다. 그 후부터 항상 이상한 기운이 구름 피어오르듯 돌무더기 속에서 일어납니다.”

이렇듯 하찮은 돌무더기 몇 개도 이렇듯 조화를 부리는데, 하물며 시조의 3612음보야 말로 얼마나 오묘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겠는가. 물론, 시조의 초장에는 흐름’()이 있고 중장에는 굽이()가 있으며 종장의 처음 음보에는 마디’()가 있고, 종장의 끝 음보에는 풀림’()이 있다. 이를 더 설명하자면, 우리가 활을 쏠 때에 사선에 들어서서 활을 들면 그게 흐름이다. 그리고 과녁을 향하여 활을 조준하면 그건 굽이이다. 그러고 나서 활시위를 당기면 그게 마디이고 당긴 활시위를 놓으면 그게 풀림이 된다. 또 하나. 우리가 도리깨질을 할 때, 도리깨를 잡으면 그게 흐름이고, 그 도리깨를 머리 위로 올리면 굽이이며, 도리깨의 휘추리를 휘두르면 그게 마디이고, 돌린 휘추리를 힘차게 내려치는 게 풀림이다.

지금은 현대시조의 시대이다. 더군다나 시조시인의 숫자가 1,000명을 넘고 있으니 이제야말로 정형 쪽으로 한 번 더 조일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냇물이 흘러가면서 흐름굽이를 만나고 나중에는 마디를 만난다. 마디로 나는 폭포를 연상한다. 물이 힘차게 밑으로 쏟아질 때의 그 장관을 어찌 잊겠는가. 그때 비로소 무지개를 내보이게 된다. 그리고 폭포가 쏟아지고 나면 거기에 풀림의 깊은 소를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정형에서 종장은 더욱 중요하다.

내 생각은 이렇다. 시조가 무지개를 내보이게 되려면 시조를 더욱 정형으로 조이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강조하건대, 시조는 정형시이다. 듣는 시조가 아니라, 보는 시조로서의 정형을 내보여야 한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면 앞으로 시조의 자수 정형, 즉 음수율은 어떠해야 되는가. 나는 시조의 정형을 초장과 중장의 각 구 음절을 3 44 4로 하고, 종장 전체의 음절을 3 5 4 3이나 3 5 4 4인 상태로 해야 한다.’라고 보았다. 그리고 특히 그 중에서 가장 이상적인 형은, 초장과 중장은 3, 4, 4, 4이고 종장은 3, 5, 4, 3이라고 여긴다.

그러면 이상적 형의 각 음보(소절)에 대한 음양관계(陰陽關係)를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초장의 각 음보는 , , , 으로 되어 있다. , 음 쪽으로 기우러져 있다. 그리고 중장 또한 각 음보가 , , , 이다. 초장과 같다. 알다시피 시조는 종장의 무게가 초장과 중장을 합친 것과 같다. 그런데 종장의 음보는 , , , 으로 되어 있다. 일대 반전이고 변화이다. 일진광풍이 일고 모래가 날리는 듯싶다. 이로써 시조는 평형을 유지하며 반듯하게 서게 된다. 우리는 이를 무시하지 못한다. 태극기를 보면 분명해진다.

무엇이든지 구태의연해서는 안 된다. 그 시대에 맞게 변모하여야 한다. 단언컨대 앞으로는 풀어 헤치는 시대가 아니라 더욱 조이는 시대가 될 것으로 믿는다.

 

 

 

 

(3)

 

공자께서 시조에 대하여 아시게 되셨다면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作不正 不讀(작부정 불독).” 이는, “반듯하게 짓지 않았으면 읽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이 말씀을 듣는다면 어찌 등에 식은땀이 나지 않겠는가.

어릴 적에 놀던 생각이 난다. 그 당시에는 아이들이 가지고 놀 장난감도 변변치 못하여서 제기차기나 자치기나 구슬치기 등을 하고 놀았다. 그러나 놀이라면 무엇보다도 팽이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사촌형이 낫으로 깎아서 만들어준 팽이를 얼음판에서 돌리며 놀던 때를 결코 잊을 수 없다. 팽이를 돌릴 때에는 요령이 필요하다. 비틀거리는 팽이를 채로 열심히 때려서 일단 일으켜 세우면 그 다음부터는 별로 힘이 안 든다. 채로 착착 감기게 때리면 때릴수록 팽이는 더욱 신나게 돌아가는데, 어느 순간에 움직이지 않는 듯이 선다. 이 때에는 이 세상마저 모두 멎고 고요함이 감돈다. 이를 가리켜서 우리는 팽이가 섰다라고 일컬었다. 팽이가 서는 순간의 그 아름다움을 우리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든지 그 나름으로 고유한 민족시(民族詩)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없다면 그게 무엇보다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는 멋진 민족시를 지니고 있으니 그 이름이 바로 시조’(時調)이다.

게다가 시조는 엄격한 절제를 지닌 정형시(定型詩)이다. 모두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정형시란 전통적으로 시구(詩句)나 글자의 수와 배열의 순서 및 운율 등이 일정하게 정해져 있는 시를 일컫는다.

역사적으로 보아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정형시는 한시(漢詩)일 것 같은데, 한시 중에서도 가장 화려하게 꽃을 피운 시기는 당나라 때로 이른바 당시(唐詩)이다. 당시들을 살펴보면 그 형()이 매우 엄격하게 짜여 있다. 이를 바꾸어 말한다면, 시에 있어서 그 엄격함이 정형시의 전성시대를 이룬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제 바야흐로 한류(韓流)가 세계적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그리고 그 흐름의 한가운데에 한글이 있다. 한글의 위대성을 알리는 방법이 많겠으나, 이를 문학작품, 특히 시()로써 알리는 방법이 무엇보다 효과적이라고 여긴다. 그것도 자유시가 아니라, 민족시인 시조’(時調)로 알린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가 아니겠는가.

 

 

 

 

 

 

(단수 시조)

 

 

 

 

내 길 4

 

김 재 황

 

 

 

아무리 좋은 길이 바로 옆에 있다 해도

 

어차피 한 길밖에 딛고 갈 수 없잖은가,

 

오로지 내가 고른 길 쉬지 않고 가겠네.

 

 

 

 

 

 

물총새가 되어

 

 

흐르는 물속으로 가는 눈길 쏟노라면

 

물길을 거슬러서 꼬리치는 바로 그것

 

살같이 내리꽂아서 단수 시조 잡는다.

 

 

 

 

 

 

 

 

시조 짓기

 

 

 

하얗게 밤 새워야 겨우 한 수 건지는데

 

마음에 쏙 드는 것 만나기는 별 따기지

 

못나도 날 꼭 닮아서 버릴 수가 없다네.

 

 

 

 

 

 

 

 

하나 둘 셋

 

 

 

날마다 남들처럼 꼭 챙겨서 세 끼 먹지

 

가난을 즐기니까 내 밥값은 시조 한 수

 

사느니 마음과 몸이 두 길 가지 않기를.

 

 

 

 

 

 

반구정 아니라도

 

 

강물이 길을 내고 갈매기가 노니는 곳

 

그런 곳 아니라도 시조 짓고 살아가면

 

바다가 그 앞에 와서 넘실넘실 춤춘다.

 

 

 

 

 

 

 

 

 

 

(연시조)

 

 

4

 

김 재 황

 

 

 

밤이면 살금살금 산과 들로 나서는 때

풀잎이 흔들려도 눈이 반짝 크게 되고

멋있는 노래 한 끈을 호기심에 찾는다.

 

하늘에 달이 뜨면 그림자를 낮게 끌고

그늘로 들어서는 갈색 바탕 검은 무늬

꼬리는 가락을 탄 듯 가로띠가 빛난다.

 

어디서 들려오나 맑게 열린 냇물 소리

작지만 세운 발톱 날카로운 어둠 아래

거슬러 물길 오르는 은빛 시조 움킨다.

 

 

 

 

 

 

 

 

 

 

 

 

 

 

시조 한 편

 

 

시절에 몸을 담고 노래하는 시조 한 편

바람이 부는 대로 갈꽃 숲이 열린 대로

긴 숨결 사려 모아서 가락 위에 싣는다.

 

배꽃이 피는 날엔 거나하게 대포 한 잔

추석에 달이 뜨면 넉넉하게 시조 한 편

선비가 가는 그 길에 알맞은 멋 보탠다.

 

아픔을 지닌 만큼 내 마음은 커질 테고

눈물이 흐른 만큼 네 세상은 맑을 테니

나와 너 흘러가도록 시조 한 편 펼친다.

 

 

 

 

 

 

 

 

 

 

 

 

 

 

 

 

 

 

폭포 아래에서

 

 

흐름을 밟고 가서 굽이 또한 거친 다음

툭 꺾인 물 마디가 쏟아지며 부서질 때

비로소 하늘 소리는 더운 피를 막 쏟네.

 

긴 솔이 홀로 서서 물바람을 가득 안고

입 시린 물방울에 일곱 꿈이 살짝 피면

목이 튼 우리 가락이 절로 외는 시조창.

 

마음껏 여는 귀엔 거친 맷돌 돌리는 듯

눈 뜨고 둘러보니 둥근 우레 울리는 듯

성내며 더 을러 봐도 어깨춤만 또 으쓱.

 

 

 

 

 

 

 

 

 

 

 

 

 

 

 

 

 

시조 수행

 

 

날마다 한 수씩은 꼭 지어야 개운한데

그 일감 변함없이 뜻 세움과 마찬가지

오늘도 딛는 걸음이 흔들리면 안 되니.

 

가슴을 확 비워야 대숲 또한 다가오고

흰 달빛 내리는데 둘러서는 언덕 솔숲

즐겁게 벗을 만나는 선비 길을 나서지.

 

하늘에 검은 구름 걱정하며 붓을 들면

온 얼룩 다 지우고 펼쳐지는 마음자리

그으니 강물이 되는 어짊이라 곧은 획.

 

 

 

 

 

 

 

 

 

 

 

 

 

 

 

 

 

백수 선생님을 그리며

 

 

처음 뵌 날이라면 사십 년이 더 지났지

광화문 골목 안에 자리 잡은 초원 다방

나가면 늘 반겨 주신 선생님을 못 잊지.

 

엉성한 내 작품을 무릎 앞에 펼쳐 놔도

탓하지 않으시고 한 자 한 자 짚으셨지

참 크게 가르침 안고 외로운 길 걸었지.

 

올바른 은혜 보답 바른 시조 보이는 것

조이고 더 갈아서 고운 노래 만드는 일

그래야 선생님 얼굴 긴 꿈에서 또 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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