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는 詩와 닦는 詩
김 재 황
누가 나에게 ‘왜 사느냐?’라고 묻는다면 나 또한 김상용 시인(1902~1951 년)처럼 그저(대답하지 못하고) ‘웃을’ 수밖에 없다. 나는 내가 스스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내 삶이란 어쩌다가 시작되었다. 순전히 타의다. 태어났으니 살아갈 뿐이다.
그러나 詩를 쓰는 일은 다르다. 시인은 누구든지 스스로 그 일을 선택했다. 누가 억지로 詩를 쓰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우연히 시인이 된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 다시 말해서 시인은 결단코 자의로 태어난다. 스스로 그 길을 선택하였으니 힘차고 씩씩하게 걸어가야 한다. 자기가 선택한 일에는, 반드시 무거운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누가 나에게 ‘왜 詩를 쓰느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그에게 분명하게 ‘내 몸을 닦으려고-.’라고 대답하겠다. 누가 무어라고 하든지, 시인은 선비이고 선비는 끊임없이 몸을 닦아야 한다. 그렇다. 시인이 몸을 닦는 방편은 ‘詩를 짓는 일’이다.
그렇건만, 일부 시인이라는 사람은 詩를 판다. 많이 팔리기를 바라고, 더 나아가서 많이 팔리도록 詩를 쓴다. 독자의 기호에 영합하려고 한다. 그런 詩가 어찌 ‘몸을 닦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겠는가. 독자를 의식하는 순간, 詩는 순수성을 잃는다. ‘순수성을 잃은 詩’는 더 이상 詩가 아니다. ‘광고 문안’이요 ‘상품’이다. 그러하니 그런 사람은 ‘시인’이라고 부르면 안 되고 ‘상인’이라고 불러야 옳다.
우리의 스승이신 공자는 詩를 한 마디로 ‘사무사(思無邪)’라고 했다. 이는, ‘머리와 가슴에 담긴 바라고 그리워함(생각)이 어긋나거나 비뚤어짐(간사하고 교활함)이 없다.’라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詩는 순수하다.’라는 강조의 말이다. 그렇지 못한 시를 누가 사랑하고 아끼겠는가.
이 세상의 많은 풀들이 우리의 아픔을 낫게 하는 약재가 된다. 과연, 그 풀들이 우리들의 아픔을 의식하여 그 잎 안에 약 성분을 담았을까? 아니다. 풀들은 스스로 살아가는 방편으로 그런 성분을 마련하였다. 그런 게 높은 베풂을 이룬다. 詩도 또한 그렇게 이 세상에서 큰 베풂을 펼친다. 게다가 베풂 자체가 ‘의식되거나 의도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명해지기를 바라는데, 소위 ‘유명하다’는 게 무엇인가. 공자의 말처럼, 우리가 지금 ‘유명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거의가 다 ‘소문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게 뭐가 즐거운 일이겠는가. 문득 고전인 ‘중용’(中庸)에 들어 있는 글 한 구절이 떠오른다. ‘군자지도 비이은’(君子之道 費而隱)! 그렇고말고, 군자의 길은 빛나지만 숨어 있다.
시인은 오직 詩를 방편으로 쉬지 말고 몸을 닦아야 한다. 그 시가 어떻게 세상에 쓰이든지 마음에 두지 말아야 한다. 그게 ‘시인의 바른 길’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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