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파는 詩와 닦는 詩

시조시인 2016. 6. 1. 08:22

                                            파는 와 닦는

 

                                                               김 재 황

 

 

 

누가 나에게 왜 사느냐?’라고 묻는다면 나 또한 김상용 시인(1902~1951 )처럼 그저(대답하지 못하고) ‘웃을수밖에 없다. 나는 내가 스스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내 삶이란 어쩌다가 시작되었다. 순전히 타의다. 태어났으니 살아갈 뿐이다.

그러나 를 쓰는 일은 다르다. 시인은 누구든지 스스로 그 일을 선택했다. 누가 억지로 를 쓰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우연히 시인이 된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 다시 말해서 시인은 결단코 자의로 태어난다. 스스로 그 길을 선택하였으니 힘차고 씩씩하게 걸어가야 한다. 자기가 선택한 일에는, 반드시 무거운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누가 나에게 를 쓰느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그에게 분명하게 내 몸을 닦으려고-.’라고 대답하겠다. 누가 무어라고 하든지, 시인은 선비이고 선비는 끊임없이 몸을 닦아야 한다. 그렇다. 시인이 몸을 닦는 방편은 를 짓는 일이다.

그렇건만, 일부 시인이라는 사람은 를 판다. 많이 팔리기를 바라고, 더 나아가서 많이 팔리도록 를 쓴다. 독자의 기호에 영합하려고 한다. 그런 가 어찌 몸을 닦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겠는가. 독자를 의식하는 순간, 는 순수성을 잃는다. ‘순수성을 잃은 는 더 이상 가 아니다. ‘광고 문안이요 상품이다. 그러하니 그런 사람은 시인이라고 부르면 안 되고 상인이라고 불러야 옳다.

우리의 스승이신 공자는 를 한 마디로 사무사(思無邪)’라고 했다. 이는, ‘머리와 가슴에 담긴 바라고 그리워함(생각)이 어긋나거나 비뚤어짐(간사하고 교활함)이 없다.’라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는 순수하다.’라는 강조의 말이다. 그렇지 못한 시를 누가 사랑하고 아끼겠는가.

이 세상의 많은 풀들이 우리의 아픔을 낫게 하는 약재가 된다. 과연, 그 풀들이 우리들의 아픔을 의식하여 그 잎 안에 약 성분을 담았을까? 아니다. 풀들은 스스로 살아가는 방편으로 그런 성분을 마련하였다. 그런 게 높은 베풂을 이룬다. 도 또한 그렇게 이 세상에서 큰 베풂을 펼친다. 게다가 베풂 자체가 의식되거나 의도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명해지기를 바라는데, 소위 유명하다는 게 무엇인가. 공자의 말처럼, 우리가 지금 유명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거의가 다 소문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게 뭐가 즐거운 일이겠는가. 문득 고전인 중용’(中庸)에 들어 있는 글 한 구절이 떠오른다. ‘군자지도 비이은’(君子之道 費而隱)! 그렇고말고, 군자의 길은 빛나지만 숨어 있다.

시인은 오직 를 방편으로 쉬지 말고 몸을 닦아야 한다. 그 시가 어떻게 세상에 쓰이든지 마음에 두지 말아야 한다. 그게 시인의 바른 길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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