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가지런한 시조에 관하여

시조시인 2022. 9. 18. 12:49

(새 시조론)

                       가지런한 시조에 관하여


                                                                      김 재 황
1. 들어가며

 솔직히 말하건대, ‘네모반듯한’ 시조를 짓게 된 동기가 나에게 있다. 어느 날 ‘논어’를 읽고 있다가 ‘향당’ 편 8에 이르렀다. 거기에서 ‘할부정 불식’(割不正 不食: 반듯하게 썰지 않았으면 먹지 않으셨다)을 보게 되었는데, 이게 내 눈에는 ‘작부정 불독’(作不正 不讀: 반듯하게 짓지 않았으면 읽지 않으셨다)으로 보였다. 그 순간, 나는 시조도 반듯하게 지어야 하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물론, ‘반듯한 시조’는 그 말 그대로, 써 놓은 시조가 ‘네모반듯한’ 시조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초장과 중장과 종장의 길이가 같은 시조이다. 이를 나는 ‘가지런한 시조’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 ‘가지런한 시조’를 지을 때, 한 가지 명심해 두어야 할 전제 조건을 세웠다. 즉, 시조 형식의 기본형과 한글맞춤법의 띄어쓰기를 철저히 해야 하겠다고 여겼다. 이를 지켜야만 ‘가지런한’의 의미를 살릴 수 있다고 믿었다.


2. 시조의 율격

 내가 처음에 시조를 공부할 1970년대만 해도, 시조의 율격은 참으로 느슨하였다. 시조는 정형시였지만, 기본율에서 종장의 첫 음보만 3글자(음절)로 고정하였을 뿐, 다른 음보는 더하기나 빼기를 허용하였다. 
 즉, 시조의 기본율은 초장의 각 음보 글자(음절) 수가 3(4) 4 3(4) 4로서 앞의 구가 7(8)자이고 뒤의 구가 7(8)자이다. 중장도 3(4) 4 3(4) 4로서 앞의 구가 7(8)자이고 뒤의 구도 7(8)자이다. 다만, 종장은 3 5 4 3(4)인데, 앞의 구에서 첫 3자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 이렇듯 종장이 달라짐은 내재율의 변용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시조는 일행직류(一行直流)의 단순함을 멋지게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시조에 있어서 허락될 수 있는 테두리가, 초장과 중장의 각 구는 9자까지이다. 그리고 종장의 첫 3자는 부동이나 그다음의 5자는 7자까지이다. 또, 둘째 구에서 앞의 4자는 5자까지 허용되고 뒤의 3자는 4자까지 가능하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어디까지나 시조에 대한 용념(用念)은 3 5 4 3(4)인 종장에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면 이를 매우 어렵게 생각하겠지만, 우리나라에서 태어나서 우리의 생활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시조를 아주 쉽게 익힐 수 있다. 왜냐하면, 시조야말로 오랜 세월 동안 우리 생활에서 ‘깎고 갈고 다듬고 간추려 온 틀’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저절로 발걸음이 제집으로 옮겨지듯이 시조로 자연스럽게 들어가게 된다. 그러면 정형시로서 갖추어야 할 면모(각 음보의 글자 수)를, 노산 이은상 선생의 작품 ‘성불사의 밤’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 소리       3 4 3 4
 주승은 잠이 들고 객이 홀로 듣는구나,    3 4 4 4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   3 5 4 3

  기본율에 아주 잘 맞는다. 종장의 둘째 구(句)의 글자 수(음절)도 4와 3으로 되어 있다. 이는, 역진(逆進)이다. 끝을 힘 있게 맺을 수 있고 긴 여운을 남기게 한다. 이를 가리켜서 ‘미인형 시조’라고, 나는 말한다. 우리가 여자를 만날 때, 우선 맨 처음으로 그 여자의 생긴 모습을 보게 된다. 그 생긴 모습이 아름다우면 호감을 얻게 된다. 그렇다고 시조가 겉으로 보는 아름다움에만 무게를 두는 건 절대로 아니다. 시조도 시(詩)이기 때문에 그 내용이 감동적이어야 한다. 뚜렷한 개성미를 지녀야 한다. 기본율로 보아서는 조금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허용되는 범위 안에서 더욱 휘청거리는 멋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런 작품들은, 미인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들 작품대로 개성미가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시조는 글자 수나 세고 있는 고루한 시가 절대로 아니라고 하였다. 내재율만 잃지 않는다면 얼마큼의 글자 가감이 자유롭다고 하였다. 그러면 다음은 이호우 선생의 작품 ‘흐름 속에서’의 첫째 수를 살펴보기로 한다.

 여긴 내 신앙의 둥주리 낙동강 흥건한 유역         2 7 3 5
 노을 타는 갈밭을 철새 떼 하얗게 날고             2 5 3 5
 이 수천(水天) 헹구는 가슴엔 ‘세례요한’을 듣는다.   3 6 5 3

 이처럼 시조란 틀에 박힌 듯싶으면서도 틀에 박히지 않고 또 자유분방하면서도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 우리만의 정형시라고 말할 수 있었다. 다만, 반드시 내재율을 잃지 않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늘 파격(破格, 자수가 많거나 적다)은 조심스럽다. 그러면 시조에 있어서 허락될 수 있는 테두리는 구체적으로 어떠할까.

 초장 3 4 (9자까지 가능) 3 4 (9자까지 가능)
 중장 3 4 (9자까지 가능) 3 4 (9자까지 가능)
 종장 3(부동) 5(7자까지 가능) 4(5자까지 가능) 3(4자까지 가능) 

 다시 말해서, 초장과 중장의 전후 구가 3자와 4자로 모두 합하여 7자인데 9자까지가 가능하고(예컨대 3과 4도 좋고 4와 4도 좋고 3과 5도 좋고 2와 6이나 3과 6도 좋고 2와 7이나 4와 5도 좋다.), 종장의 3 5 4 3에서 첫 3자는 부동이지만 그다음의 5는 7자까지, 4는 5자까지, 3은 4자까지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를 아무나 함부로 흉내 내어서는 안 된다. 오랫동안의 ‘시조 짓기에 대한 경륜’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공자의 말을 빌리면,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欲 不踰矩, 무엇이든지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 ‘유’는 ‘넘다’ ‘이기다’ ‘뛰다' '더욱' ‘멀다’ ‘아득하다’ 등의 뜻을 지니고 ‘구’는 ‘곱자’를 가리키는데 ‘법도’ ‘규칙’ ‘기준’ ‘준칙’ 등의 뜻을 지닌다.)의 경지에 오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너무 지나치게 파격을 하면, 자칫 시조로서의 정형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시조를 공부하기 시작할 때만 하여도 이 말에 따랐다. 그렇게 작품을 지었고 그러한 작품이 신인상에 당선되어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러나 나는 문인이 되어 작품을 짓게 되면서 너무 지나친 파격은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각 장 음보의 글자(음절) 수가 초장 3(4) 4 4 4이고 중장 3(4) 4 4 4이며 종장 3 5 4 3(4)를 따르게 되었다.
 여기에서 시조에 관해 다시 짚어 볼 게 있다. 시조는 정형시이다. 정형시(定型詩)란, ‘시구’(詩句)나 글자의 수와 배열(配列)의 순서 등이 일정하게 정해져 있는 시형(詩型)을 말하는 게 아닌가. 한시(漢詩)의 오언(五言)이나 칠언(七言)의 절구(絶句)와 율시(律詩)가 그러하지 않은가. 또 서양의 소네트(sonnet)는 어떠한가.
 시조는 3장(章) 6구(句) 12음보(音步)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서 ‘장’(章)은 ‘문장’을 나타낸다. ‘문장’이란 ‘한 줄거리의 사상이나 느낌을 글자로 기록하여 나타내는 단어의 결합’이다. ‘글월’이라고도 한다. ‘구’(句)는 ‘글귀’이다. ‘글귀’란 ‘글의 끊어진 구절’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음보’(音步)란 ‘시가의 운율을 이루는 기본단위’로서 대개 어절로 표상되는 시간적 단위이고 우리의 시가에서는 휴지(休止)의 한 주기라고 할 수 있는 3음절 또는 4음절 등이 보통 한 음보를 이룬다. 이는 글자 그대로 ‘소리걸음’이다. 음보는 음절(音節)이 모여서 이루어지는데, 이 음절은 글자 그대로 ‘소리마디’이다. 즉, ‘어머니’는 ‘음보’이고 ‘어’와 ‘머’와 ‘니’는 각각 그 하나씩이 ‘음절’이다. 이를 ‘글자 수’라고도 말한다. 그리고 ‘음절’은 홀소리와 닿소리가 모여서 이루어진다. 이 홀소리와 닿소리는 바로 ‘음소’(音素)이다. 이를 풀어서 ‘소리바탕’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냥 이를 맞추면 정형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마음에 흡족하지 않다. 시조의 기본형은 각 음보의 글자(음절) 수가 초장 3, 4, 4, 4에 중장 3, 4, 4, 4이고 종장 3, 5, 4, 3이다. 이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듯싶다. 그러면 글자(음절) 수에 있어서 허용된 테두리는 어떠한가, 종장 첫째 음절은 3자 고정이고, 둘째 음절은 5~7자로 하며, 나머지는 각 음보의 음절당 2~5자까지 허용하고 있다. 그래서 모든 음절의 수는 기본형에 2~3 음절(글자) 가감을 허용한다고 되어 있다. 몇십 년 동안을 시조 안에서 살아온 나로서는, 이것이 참으로 못마땅하다. 
 시조는 음보에서 ‘가락’이 살아난다. ‘3,4조’니 ‘4,4조’니 하는 게 그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홀수인 음보를 ‘쿵’으로 하고 짝수인 음보를 ‘작’으로 할 때, 시조 3장의 음보는 ‘쿵 작 작 작, 쿵 작 작 작, 쿵 쿵 작 쿵’으로 된다. 여기에서 ‘작 작’과 ‘작 쿵’은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 ‘작 작’이 ‘잇는 느낌’을 주는 반면, ‘작 쿵’은 ‘끝나는 느낌’을 준다. 이때의 ‘작 쿵’은 음보의 음절 수가 ‘4, 3’이다. 이를 가리켜서 ‘역진(逆進)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이 역진은 종장의 끝 음보에만 사용하게 된다. 
 요컨대 시조의 기본형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각 음보의 음절 수를 역(易)으로 풀어보면, 홀수는 양(陽)이고 짝수는 음(陰)이므로 초장이 ‘양 음 음 음’이고 중장이 ‘양 음 음 음’이며 종장은 ‘양 양 음 양’이다. 이를 요약하면, 초장은 ‘음’이고 중도 ‘음’이며 종장은 ‘양’이다. 다시 말해서 초장과 중장과 종장의 효(爻)가 ‘음 음 양’으로 되어 있다. 이는, 8괘(卦) 중 ‘진’(震)을 가리킨다. 
 팔괘(八卦)는 ‘자연과 인간의 모든 현실을 관찰하여 그 경험적 내용을 귀납해 얻은 원리’라고 한다. 그리고 맨 밑이 양효(陽爻)이며 둘째와 셋째가 음효(陰爻)인, 진괘(震卦)는 “하늘의 이치를 회복하려는 그 힘찬 움직임 때문에, ‘우레’를 나타내고 ‘움직일 동(動)’이란 의미가 가장 강조되어 있다.”라고 알려져 있다. 여기서 내재율(內在律)의 빼어남이 생기는 게 아닐까.
 무엇이든 변해야 한다. 아니 변할 수밖에 없다. 세월은 저만치 흘러갔는데, 어찌 시조만 제자리걸음인가. 구태의연(舊態依然)한 게 자랑은 아니다. 예나 이제나 조금도 변함이 없이 여전하여 아무런 진보나 발전이 없는 것은 분명히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시조의 기본형에 맞춘 ‘가지런한 시조’를 짓게 되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글자 수를 따지는 것은 고루하다고 한다. 어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가. 글자 수에 맞도록 다른 말을 고르는 묘미는 어찌 모르는가. 더군다나 띄어쓰기에 맞도록 고심 끝에 가장 알맞은 어휘를 찾아냈을 때의 그 쾌감은 어찌 알겠는가.


3. 나가며

 무엇이든 처음에는 서툴고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어려움을 견디며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된다. 무술의 수련이 그와 같지 않겠는가. 시조도 가지런하게 쓰기 시작하면 몇 년 안에 손에 익게 된다. 그 작품은 명실공히 정형시가 된다. 그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서 아름다움을 더할 수 있다.
 한시에서 ‘운을 맞춘다.’라는 말을 들어 보았는가. 운(韻)이란, ‘성(聲)과 음(音)이 서로 어울리는 것’을 가리킨다. 즉, ‘서로 다른 음이 서로 따르는 것’을 일러서 ‘화’(和)라고 하며, ‘같은 성(聲)이 서로 응하는 것’을 일러서 ‘운’(韻)이라고 한다. 이 ‘운’이 어찌 한시에서만 존재하겠는가. 시조에서도 얻을 수 있다.
 시조에서는 종장에 가장 무게를 둔다. 그리고 나는 시조의 종장 마지막 음보에 애정이 깊다. 그래서 운(運)이 좋게도 이 음보에서 ‘운’(韻)을 만날 수 있었다.


 골짜기 가린 숲에 머문 새는 멀어지고
 꿈결에 뒤척이면 솔 냄새가 이는 바람
 천수경 외는 소리만 기둥 위로 감긴다.

 어둠을 밝혀 가는 믿음이 곧 하늘이라
 구름은 문을 열어 저승까지 환한 달빛
 관세음 젖은 눈길이 고운 미소 남긴다.

 그림자 끌던 탑이 별자리에 앉고 나면
 버려서 얻은 뜻은 산 마음을 따라가고
 숙모전 가려운 뜰도 물빛 품에 담긴다.
            -졸시 ‘동학사에서’ 전문

 여기에서 눈여겨볼 것은, 특히 각 종장에 언급된 ‘천수경’과 ‘관세음’과 ‘숙모전’이다. 이를 징검다리처럼 놓아서 동학사의 얼굴을 그려 보았다. 이게 동학사 모습이다. 그뿐만 아니라 각 수의 끝(종장 끝 음보)마다 ‘감긴다’와 ‘남긴다’와 ‘담긴다’로 ‘ㅁ긴다.’라는 글자(韻)를 맞추었다. 이는, 우리나라 말의 우수성을 나타내는 의미도 지닌다. 다음은 비교적 쉽사리 얻은 연시조 한 편을 소개한다.
        
저무는 저 하늘엔 그리움이 담겨 있고
꿈길로 이 냇물은 어서 가자 이끄는데
더위를 식히고 나서 내 연필을 듭니다.

아직은 달도 없이 높게 뜨는 뭉게구름
어디로 가는 건지 서두르는 바람 걸음 
낱낱이 보내고 싶은 내 소식을 씁니다.

까맣게 닫힌 밤이 호수처럼 문을 열면
마침내 웃음 물고 동그랗게 뜨는 얼굴
새에게 꼼꼼히 접힌 내 편지를 줍니다. 
        -졸시 ‘달맞이꽃 연서’ 전문

 
 이 작품에서도 눈여겨볼 게 있다. 가만히 살피면 각 수의 끝(종장 끝 음보)마다 ‘듭니다’ ‘씁니다’ ‘줍니다’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모두가 ‘ㅂ니다.’로 되어 있다. 이 또한 의도적이다. 그런데 ‘연필을 들고’ ‘소식을 쓰고’ ‘편지를 주는’ 순서를 나타낸다. 초장과 중장과 종장의 끝 음보가 ‘ㅂ니다.’로 끝나는 운(韻)을 지니는 일도 멋지지만, 그 과정의 순서가 맞아떨어지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이는, 우리 언어가 그만큼 풍성하다는 뜻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렇다고 이렇게 시조를 꼭 지어야 한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그 많은 시조시인 중에서 나 하나쯤은 이렇듯 엄격하게 정형을 지켜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