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쥬르, 나폴레옹

(117) 나폴레옹 3세가 태어나다

시조시인 2008. 12. 23. 06:52

(117)

   그런데 나폴레옹은 루이의 아들, 즉 조카를 자기의 후계자로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형 조제프는 자신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고 합니다. 그 조카가 누구인 줄 압니까? 그 조카의 어머니는 바로, 조제핀이 나폴레옹과 결혼할 때에 데리고 들어온 딸, 다시 말해서 나폴레옹의 의붓딸인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입니다. 그러니까, 나폴레옹의 동생 루이는, 나폴레옹의 의붓딸과 결혼한 겁니다. ‘의붓딸’이란, ‘개가하여 온 아내나 첩이 데리고 들어온, 전 남편의 딸’을 가리킵니다. 한자말로는 ‘의녀’(義女) 또는 ‘가봉녀’(加捧女)라고 합니다. 그럼, 상피붙은 게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상피붙다.’(相避-)는 ‘가까운 친척 사이에 성(性) 관계를 갖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루이의 아내는 법적으로 형의 딸이지만, 실제적으로는 남남인 형의 의붓딸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법적으로 서로 결혼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는 친족의 범위를 알고 있습니까? 결혼이 허용되지 않는 친족의 범위는, ‘피를 나눈 사람과 그 배우자’로 되어 있지요.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경우라고 하더라도, 나폴레옹의 동생 ‘루이’와 나폴레옹의 의붓딸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가 결혼하는 데는 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습니다. ‘하자’(瑕疵)는 ‘흠 또는 결점’을 말하거나 ‘법률 또는 당사자가 예상한 상태나 조건 따위가 결여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고려시대에는 친족이나 아주 가까운 사이에 있는 사람들이 같은 부서에서 벼슬살이를 하거나 재판하는 일을 맡거나 과거시험을 감독하는 일 등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공정성을 기하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였지요. 그와 같은 일을 ‘상피’(相避)라고 했답니다. 다시 말하자면, ‘금기’(禁忌)인 셈이었지요. ‘금기’는, 신앙이나 관습 등으로 ‘꺼리어 금하거나 피함’ 또는 ‘어떤 병에 어떤 약이나 음식이 좋지 않은 것으로 여겨서 쓰지 않는 일’ 등을 이릅니다. 그런 연유로 안하여, 해서는 안 될 일을 할 때에 ‘상피붙는다.’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1808년, 나폴레옹의 동생 ‘루이’와 나폴레옹의 의붓딸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 그 부부 사이에서 나폴레옹의 조카(Charles Louis N. Bonaparte)가 태어났습니다. 그가 바로 나폴레옹의 조카이자 나폴레옹3세입니다. ‘조카’는 형제자매가 낳은 아들딸을 가리키는 친족 호칭’이라는 사실은 모두 알지요? 그러나 이 ‘조카’의 어원에 대해서는 잘 모르리라고 여겨집니다.


‘조카’의 어원은, 중국의 ‘개자추’(介子推)라는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답니다. 이 사람은 진나라의 문공이 숨어 지낼 때에 그에게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먹이며 그를 받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왕이 된 문공은, 개자추를 잊고 그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비관한 개자추는, 산속으로 들어가서 불을 지른 다음에 나무를 껴안은 채로 타 죽고 말았습니다.

그 때에서야 후회한 문공이, 개자추가 끌어안고 죽은 나무를 베어서 그것으로 나막신을 만들어 신고는 ‘족하(足下)! 족하(足下)!’하며 애달프게 불렀답니다. 이는, ‘문공 자신의 사람됨이 개자추 발의 아래에 있다.’라는 뜻이었답니다.

여기에서 생긴 ‘족하’(足下)라는 호칭은, 그 후의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천자 족하’나 ‘대왕 족하’ 등의 임금을 부르는 호칭으로 쓰였다가, 그 이후에는 ‘임금의 발’ 아래에서 일을 보는 사관의 호칭으로 바뀌었고, 더 후대로 내려오면서 발음에 따라 ‘족하’가 ‘조카’로 변하였으며, 같은 나이 또래끼리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말로 쓰이기 시작했다는군요.   


나폴레옹의 조카인 그 나폴레옹3세가 또 한 번 프랑스를 18년 동안이나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니, 나폴레옹은 역시 사람을 제대로 볼 줄 아는 혜안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혜안’(惠眼)은 ‘날카로운 눈’ 또는 ‘사물의 본질이나 이면을 꿰뚫어보는 눈’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혜안’은 원래 불교에서 이르는 ‘오안’(五眼) 중의 하나입니다. 즉, 불교에서 말하는 이 ‘혜안’은, ‘차별이나 망상을 버리고 진리를 통찰하는 눈’을 뜻합니다. 그리고 ‘오안’은 ‘혜안’을 비롯하여 ‘육안’과 ‘천안’과 ‘법안’과 ‘불안’을 이릅니다. 다시 말해서 ‘육안’(肉眼)은 ‘인간의 육체에 갖추어진 보통 사람의 눈’이요, ‘천안’(天眼)은 ‘미세한 사물까지도 멀고 널리 볼 수 있고 중생의 미래와 생사까지도 볼 수 있다는 눈’이요, ‘법안’(法眼)은 ‘모든 법을 관찰하는 눈’이요, 그리고 ‘불안’(佛眼)은 ‘모든 법의 참모습을 환히 볼 수 있는 불심의 기능을 하는 눈’입니다.(김재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