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지럼을 타는 배롱나무
김 재 황
배롱나무는 수형이 일정하지는 않지만 수관이 옆으로 퍼지기 때문에 운치가 있으며, 줄기는 황갈색이지만 껍질이 벗겨진 자리는 희고 매끄러워서 아름다운 질감을 갖게 한다. 일본에서는 이 나무를 보고, 줄기 껍질이 너무 반질반지라고 미끄럽기에 ‘원숭이도 미끄러지는 나무’라는 표현을 쓴다. 또, 이 나무를 ‘파양수’(怕痒樹)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나무의 껍질을 손톱으로 가볍게 긁어주면 모든 나뭇가지가 간지럼을 타듯이 흔들린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정말 그럴까?’하고 머리를 갸우뚱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그렇다.
‘꽃잎이 6개로 되어 있고 그 색깔은 분홍이며 꽃은 한 곳에 몇 개씩 모여서 나고 잎은 2개씩 서로 마주난다. 그리고 손톱으로 이 나무 줄기껍질을 가볍게 긁어주면 모든 나뭇가지가 흔들리면서 간지럼을 탄다.’ 이 글은 ‘군방보’(羣芳譜)라는 책에 실려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이 배롱나무를 ‘자미화’(紫薇花)라고도 부른다. 이는, 그 꽃이 보랏빛 장미꽃을 닮았다는 말인 듯하다. 그러나 흰 빛깔의 꽃도 핀다. 가장 많이 알려지기는 ‘나무백일홍’(木百日紅)이라는 이름이다. 배롱나무의 꽃은 4월경에 피기 시작하여 피고 지면서 9월경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기후관계로 7월경에 꽃이 피어 9월경에 끝나는 게 일반적이다.
연못가에 이 나무를 심어 놓으면 물 위에 비치는 경치가 일품이다. 대문 옆에 심어도 좋고 잔디밭에 심어도 좋으며, 그 그늘 밑에 돗자리라도 하나 깔아놓으면 독서삼매에 빠지는 데 제격이다. 싹이 트는 힘이 좋기 때문에 굵은 가지에서도 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종종 본다. 이 나무가 가득 꽃을 피우고 있는 모습을 보면, 마치 노을빛 석양에 물든 꽃구름을 누구나 연상하게 된다.
너는 노을 먹인
구름 속을 헤매고 있는 꽃
너는 추억의 병을 앓는다
햇살 바른 자리에서
가슴 가득 피어나던 사랑
솜사탕처럼 달콤한
백일몽을 너는 서서 쫓는다
따뜻한 속삭임의 입김이
귓바퀴를 간질이는
아득한 전설
너는 우울을 걷고 명랑하지만
나의 시름은 아직
추위에 떨고 있다.
--졸시 ‘배롱나무’
배롱나무는 부채꽃과에 딸린 갈잎 작은큰키나무이다. 키는 3m에서 5m 정도로 자란다. 잎은 마주 나고 길둥글며 어린가지에는 잔털이 나 있다.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서 자줏빛 또는 흰빛의 다섯 잎 꽃이 원추꽃차례로 가지 끝에 모여 핀다. 열매는 삭과인데, 길둥글며 털이 있고 10월경에 결실한다. 중국 남부지방이 원산지라고 알려져 있는데,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이나 호주에도 분포한다. 구미 각국에서는 이 나무를 만날 수 없다고 한다. 이 배롱나무에 얽힌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서로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무척이나 사랑하면서도 상대방에게 그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고 멀리서 바라보며 서루의 사랑을 키워 갔다. 그러다가 남자가 먼 곳으로 일을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남자는 용기를 내어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물론, 여자도 기쁜 마음으로 그 사랑을 받아들임으로써 둘은 굳게 언약했다.
“백일이면 일을 모두 끝내고 돌아올 수 있으니 그 때까지만 기다려 주오.”
남자가 길을 떠나고 나자, 여자는 날마다 남자가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나 마음속에 가득히 그리움만 안고 있는 여자에게 이 백일은 너무나 길고 길었다. 여자는 기다리다가 지쳐서 백일을 하루 남겨 놓고 기진하여 눈을 감고 말았다. 남자는 약속했던 대로 꼭 백일 만에 돌아왔으나, 여자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니 그 슬픔이 어떠했겠는가. 남자는 눈물을 흘리며 여자의 무덤을 만들었다. 그 뒤에 그 무덤에서 한 그루의 나무가 자라났는데, 백일 동안이나 붉은 꽃이 피었다. 이는, 백일을 기다리지 못하고 죽은 여자의 혼이 꽃으로 다시 피어나서 백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배롱나무의 꽃말은 ‘참고 견딤’이다.
배롱나무는 추위에 강하지 못하므로 충남 이북지방에서는 나무의 줄기에 새끼줄을 감아서 보온하지 않으면 겨울에 얼어 죽을 우려가 있다. 그러므로 이 나무는 양지쪽에 심는 게 좋다. 가지를 잘랐을 때에 싹이 트는 힘은 보통이고, 소금기에 견디는 힘은 강한 편이다. 또, 이식은 잘 되는 편이지만, 공해에는 견디는 힘이 그리 강하지 못하다. 생장 속도는 빠르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을 좋아하며 토질은 부식질이 많은 사질양토가 적합하다.
이식은 다른 나무와 마찬가지로 싹이 트기 전인 봄과 11월 초순경이 적기이다. 심는 구덩이는 넉넉하게 파고 그 속에 퇴비나 부엽토 등을 듬뿍 넣은 다음에 흙을 약간 덮고 나무를 심도록 한다. 비료는 겨울에 쇠똥이나 깻묵 및 퇴비 등을 포기 사이에 파고 넣어 준다. 비료가 부족하면 나무의 세력이 약해져서 꽃이 잘 안 핀다.
우리나라에는 오래 된 배롱나무들이 있다. 이들은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되고 있다. 여를 들면, 부산직할시 부산진구 양정동에는 나무의 나이가 약 800살 정도로 추산되는 배롱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동래 정씨의 시조인 정문도공(鄭文道公)의 묘소 앞에 서 있는데, 키가 크고 줄기가 굵다. 우리나라 기후로 보아서는 이 곳이 적지인 듯하다. 현재 천연기념물 제168호이다. 그런가 하면, 경주시 남산 기슭의 서출지(書出池)의 방죽에도 수백 년 묵은 배롱나무가 있다. 이 못은 그 곳 마을에 살고 있는 풍천 임씨들의 소유인데, 지금은 사적 제138호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는다고 한다.
내가 삼성 그룹에 재직할 당시, 두 농장의 책임을 맡았던 적이 있다. 그 때 삼성에서는 용인자연농원(현 에버랜드)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 곳에 식재할 배롱나무 묘목을 인수받게 되었다. 업자가 묘목을 가지고 왔으나, 그 상태가 너무 안 좋았다. 잘못 인수를 받았다가는 낭패를 당하는 게 십상이었다. 그러나 전연 안 받을 수도 없는 일이라, 숙의를 거듭한 끝에 절반 정도의 고사율을 감안하여 인수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우리는 그 묘목을 살리기 위하여 얼마나 땀을 많이 흘렸는지 모른다. 솔직히 말하건대, 그때 그 일 때문에 요즘에도 배롱나무를 만나게 되면 예쁘다는 생각보다는 그 힘들었던 일이 먼저 떠오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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