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쥬르, 나폴레옹

(49) 프랑스군은 프랑스로 돌아가라!

시조시인 2008. 10. 13. 02:31

(49)

   거리를 누비고 다니는 건, 알거지가 된 사람들과 부랑자들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누비다.’는 천을 누비질하듯 ‘사람이 이리저리 거침없이 쏘다니는 것’을 말합니다. 본뜻은 ‘천을 두 겹으로 포개어서 안팎으로 만들고, 그 사이에 솜을 두어서 가로와 세로로 줄이 지게 박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만든 옷을 ‘누비옷’이라고 하며, 이렇게 만든 이불을 ‘누비이불’이라고 합니다.

왕과 정부가 하는 일에 불만을 품은 여염집 사람들까지 모두 들고 일어나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여염(閭閻)집’은 ‘일반 사람들의 살림집’을 이르는 말입니다. 줄여서 그냥 ‘염집’이라고도 합니다. 원래 ‘여염’은 ‘백성들의 살림집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가리켰지요. 이렇게 되어, 모든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서 데모를 벌이게 되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왕과 그 정부를 무너뜨리자!”

“우리들을 위한 정부를 만들자!”

“우리가 원하는 정치를 하자!”

왕과 귀족의 정치는 갈수록 더욱 파국으로 치달았습니다. ‘파국’(破局)은 ‘일이 좋지 않게 끝났을 때나 일이 결판나는 판국’을 나타냅니다. 원래는 연극에서 쓰는 용어로, ‘비극적인 종말을 이루는 부분’을 ‘파국’이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백성들의 소리는, 온 프랑스 나라 안에 파도처럼 크게 번져 갔습니다. 그러나 나라 안이 이처럼 들끓어도, 대부분의 군인들은 태풍의 눈으로 남아 있었지요. ‘태풍의 눈’은 ‘복잡하고 시끄러운 사건의 와중에도 비교적 그 사건의 영향을 받지 않고 안전하며 조용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부분’을 나타내는 말로 씁니다. 거센 바람의 한가운데에 있으면서도 바람이 없는 현상을, 기상학적으로 ‘태풍의 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와 비슷한 일이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났을 때, 우리는 ‘태풍의 눈’이라고 비유해서 말하곤 합니다. ‘지금은 잠잠한 상태이지만, 언제 폭발하게 될지 모르는 무시무시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원래 강력한 태풍이 불 때는 그 중심에 가까울수록 원심력이 강해지고, 그 때에 비교적 바람이 약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는군요. ‘태풍의 눈’의 크기는, ‘태풍 중심부의 반경 10여 킬로미터 이내에 해당되는 범위’랍니다.

나폴레옹은 군인의 한 사람으로, 거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관망하면서 팔짱을 낀 채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이윽고, 그는 무릎을 탁 쳤습니다.

‘그렇다. 이제야말로 코르시카가 독립을 할 때다!’

나폴레옹은 즉시 군대에서 휴가를 얻고는 코르시카로 향했습니다. 이런 때는 신속해야 합니다. ‘시불가실’이란 말도 있지요. ‘시불가실’(時不可失)은, 때가 한 번 가면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므로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나폴레옹은 형 ‘조제프’에게 자기의 생각을 털어놓았습니다.

“형, 프랑스에서는 왕과 귀족의 정치가 허물어지게 되었어. 그에 대신하여 국민의 정치가 실시되려고 해. 이제야말로 코르시카는 프랑스에게서 완전 독립하지 않으면 안 돼.”

또한, 코르시카의 여러 사람들에게도 그 생각을 전하고 돌아다녔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설왕설래하였지만, 젊은 사람들은 부재다언하였습니다. ‘설왕설래’(說往說來)는 ‘무슨 일의 시비를 따지느라고 말로 옥신각신함’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는 ‘언거언래’(言去言來) 또는 ‘언왕설래’(言往說來)가 있습니다. 그리고 ‘부재다언’(不在多言)은 ‘여러 말을 할 것 없이 바로 결정을 지움’을 뜻합니다. 그들은 만구일담으로 일어섰습니다. ‘만구일담’(萬口一談)은 ‘여러 사람의 의견이 일치함’을 말합니다.

“그 말이 옳다. 코르시카를 코르시카 사람의 손으로 되찾자!”

우선으로 그들은, 코르시카에 주둔하고 있는 프랑스군의 사령관에게로 가서 외쳤습니다.

“프랑스 군대는 코르시카에서 물러가라!”

“프랑스군은 프랑스로 돌아가라!”

때마침, 프랑스에서는 왕과 귀족의 정치가 허물어지고, 국민이 세운 공화정부가 새로운 정치를 막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청신호입니다. 철부지 어린아이, 즉 삼척동자(三尺童子)도 모두 알고 있듯이 ‘교차로나 건널목에 푸른 등이나 기를 달아서 통행을 표시하는 교통신호’가 바로 ‘청신호(靑信號)의 본뜻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앞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리라는 어떤 조짐’을 나타내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공화정부는 코르시카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알아내어서 가려운 곳을 긁어 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코르시카 사람들의 외침을 모두 경청했습니다. 참으로 능곡지변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능곡지변’(陵谷之變)은 ‘언덕과 골짜기가 서로 뒤바뀐다.’는 뜻으로 ‘세상일의 변천이 극심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입니다. 그리고 ‘경청’(傾聽)은 ‘귀를 기울여서 주의해 들음, 또는 귀담아 들음’을 가리킵니다. (김재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