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쥬르, 나폴레옹

(47) 가혹한 정치의 해독

시조시인 2008. 10. 11. 05:36

(47)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가혹한 정치의 해독은 호랑이의 해독보다 사납다’라는 뜻입니다.

옛날, 중국의 춘추시대 말엽에 국가의 기강이 어지러워지자, 실력만 믿고 하극상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기강’(紀綱)은 ‘으뜸이 되는 중요한 규율과 질서’를 말하고, ‘하극상’(下剋上)은 어떤 조직체에서 ‘계급이나 신분이 아래인 사람이 부당한 방법으로 윗사람을 꺾어 누르거나 없애는 일’을 가리킵니다.

공자가 살던 노(魯)나라에도 그와 같은 자가 있었는데, 바로 대부(大夫)의 벼슬을 지닌 ‘계손자’(季孫子)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마구 거두어들여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럴 즈음, 어느 날인가 공자는 제자들과 함께 수레에 앉아서 어디인가를 가고 있었습니다. 우뚝 솟아 있는 태산(泰山) 근처를 지날 때였습니다. 깊은 산골짜기라 사방이 고요한데, 어디에선가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들어 보니, 울음소리는 앞쪽의 어느 무덤가에서 나는 듯했습니다. 공자는 제자인 ‘자로’(子路)에게 사연을 알아보게 하였습니다. 자로가 다가가서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왜 여기에서 울고 있는 거요?”

여인이 울음을 그치고 눈물을 훔치며 대답했습니다.

“여기는 참으로 무서운 곳입니다. 옛날에는 시부님이 이 곳에서 호랑이에게 물려 가셨고, 이어서 남편과 자식이 모두 호랑이에게 물려서 죽었답니다.”

자로는 궁금하여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 그렇게 무서운 이 곳을 왜 떠나지 않고 있는 거요?”

여자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자로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여기는 그래도 가혹한 세금에 시달릴 걱정이 없기 때문이지요.”

예기(禮記)에 들어 있는 이야기입니다.

거지가 된 백성들은 한길로 쏟아져 나와서 그 곳의 부랑자들과 한 패가 되었습니다. ‘한길’은 ‘큰 길’이라는 뜻으로, 크다는 의미를 지닌 ‘한’이라는 고유어와 ‘길’이 합쳐진 말입니다. 한자말로는 ‘행로’(行路)라고 합니다. 큰 길에는 사람과 차가 많아지면서 도로가 넓혀지고, 그 뜻도 ‘사람과 차가 많이 다니는 길’로 변해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신분이 높은 사람들의 집이라든가 돈 많은 장사꾼들의 가게를 습격해서 돈과 음식을 빼앗게 되었습니다. 평화스러울 때는, 이들도 ‘도불습유’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나도 가슴이 아파 오는군요. ‘도불습유’(道不拾遺)는 ‘길에 떨어진 물건도 줍지 않는다.’는 뜻으로, ‘생활에 여유가 생기고 믿음이 차 있는 세상의 아름다운 풍속’을 이르는 말입니다. 글자를 바꾸어서 ‘노불습유’(路不拾遺)라고도 합니다.

프랑스의 수도인 파리에도 굶어 죽게 된 오합지중이 수만 명이나 모여들어서 난폭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오합지중’(烏合之衆)은 ‘어중이떠중이’를 말합니다. 아마도 ‘사람이 까마귀 떼처럼 새카맣게 많이 몰려들었다.’는 뜻일 겁니다. 이에 얽힌 옛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지요.

진한 말입니다. 외척인 임금을 죽인 후에, ‘왕망’(王莽)은 스스로 황제라고 하며 나라의 이름을 ‘신’(新)이라고 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했으므로, 여러 곳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이 때, ‘유수’(劉秀)라는 사람이 왕망의 군대를 물리치고 ‘유현’(劉玄)을 황제로 세워서 한(漢)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러나 각지의 반란은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한단(邯鄲)에 터를 잡은 ‘왕랑’(王郞)은, 스스로 성제의 아들 ‘유자여’(劉子與)라고 사칭하고 군사를 모아서 천자라고 일컬었는데, 그 위세가 당당하였습니다. 유수는 당장에 왕랑을 치러 나갔습니다.

한편, 하북성 상곡(上谷)의 태수인 ‘경황’(耿況)이라는 사람은 유수의 인덕을 흠모하여 아들 ‘경감’(耿龕)을 그 휘하로 보냈습니다. ‘휘하’(麾下)는 ‘어떤 장수의 지휘 아래 소속되어 있는 것, 또는 그의 지휘 아래 딸린 병사나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본래는 ‘장수를 알리는 대장의 깃발 아래’를 나타내는 말이었지요. 오늘날에도 각 군대마다 각기 다른 깃발이 있듯이, 옛날에도 각각의 장수마다 각기 다른 깃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깃발 아래로 모이는 병사는, 곧 그 장수의 부하라는 표시였습니다.

경감이 유수에게 가는 도중, 그의 부하 장수 가운데 두 명이 왕랑에게로 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왕랑이 한나라의 올바른 혈통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경감은 화가 나서 칼을 뽑아 들고 말했습니다.

“왕랑이라는 자는, 원래 도적이다. 그가 ‘유자여’라고 사칭하고 황제의 이름으로 난을 일으켰다. 내가 장안에 갔다 와서 고르고 고른 정예군으로 공격하면 왕랑의 ‘오합지중’ 같은 군사를 짓밟기란 썩은 나무를 꺾는 것과 같아서 왕랑을 반드시 사로잡을 수 있다. 너희가 도리를 잘 모르고 적과 한패가 된다면 얼마 안 가서 일족 몰살의 패망을 당하리라.”

두 부하 장수는 경감의 권유를 듣지 않고 왕랑에게로 갔습니다. 그러나 경감은 그들을 붙들지 않고, 유수에게로 가서 그를 도움으로써 큰 무공을 세웠습니다.(김재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