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풀이 나무보다 적응력이 뛰어나다

시조시인 2008. 12. 7. 08:37



풀이 나무보다 적응력이 뛰어나다

                                                                 김 재 황


 

                                                            

 옛날, 한 부부가 늙도록 아이를 얻지 못해서,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그 후, 그 부부는 뜻을 이루어서 아이를 낳았다. 그런데 그 아이는 아주 작아서 주먹 정도의 크기였으며, 나이를 먹어도 자라지 않았다. 

 하루는 그 아버지가 아이를 주머니에 넣고 낚시질을 갔다. 아이는 주머니에서 나온 후에 나뭇잎을 타고 놀다가 물고기에게 먹히고 말았다. 다행히 그 애의 아버지가 급히 그 물고기를 잡아서 배를 가르고 아이를 구해 냈다. 또 하루는 그 아이가 풀밭에서 놀다가 풀을 뜯어먹던 소의 뱃속으로 들어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쇠똥과 함께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 이야기는 그냥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생각하게 하는 바가 크다. 만약에 사람이 그렇게 작아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우선, 그 만큼 세상이 넓어질 것이다. 식사도 아주 적게 할 것이니, 식량 위기도 없을 것이다. 한 마디로 몸이 작으면 작을수록 우리는 풍족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게 틀림없다.

 이러한 이론은 식물에게도 적용된다. 즉, 큰 나무보다는 작은 풀이 넉넉한 삶을 살아간다. 식물들은 ‘어려울 때는 작아진다.’라는 식물적 생활방식의 원칙을 지키며, 그 방향으로 조금씩 진화한다. 그러므로 풀은 나무보다 적응력이 크다.

 큰 나무, 그 중에서도 늘푸른 나무인 삼나무 같은 것보다 갈잎나무인 느티나무가 조금 더 발전한 것이다. 그리고 줄기와 잎을 모두 버리고 뿌리와 종자만으로 겨울을 견디는 풀은, 그 나무들보다 더욱 진화한 상태이다. 고생대 석탄기에는 목본 양치식물이나 인목(鱗木)과 같은 나무가 번성하여 큰 삼림을 이루었다. 하지만 이 지구의 환경조건에 격변이 일어나자, 견디지 못하고 쉽게 사라져 버렸다. 그에 비해서 작고 약하게 보이는 초본성 식물은 그래도 살아남았다. 풀의 종자나, 더 나아가서 포자는, 한 개체마다 유전적 성질에 조금씩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환경이 갑자기 변하더라고 그 중에 몇은 살아남을 가능성이 크다.

 대초원 지대는 풀과 나무의 경쟁에서 풀이 이긴 상태를 보여 주고 있다. 그런 풀밭에 나무의 씨가 바람에 날려 와서 싹이 튼 다음, 뿌리를 내리고 살 수 있으리라고 여겨지지만, 실제로 그런 나무는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대초원 지대에는 벼과 초본이 밀생하여 있으므로, 활엽수의 종자가 떨어져서 싹이 텄다고 하여도 빛이 부족하기에 충분한 성장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반면에, 돌이나 모래가 많아서 물의 빠짐이 좋은 토양에서는, 얕은 층에 뿌리를 뻗는 풀보다 깊은 층에까지 뿌리를 내리는 나무가 유리하다. 이런 장소, 다시 말해서 삼림 초원지대 안의 바위산에, 그나마 참나무나 소나무가 엉성하게 숲을 이룰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외국의 들꽃들을 보면 그 색깔이 화려하거니와, 큼직큼직해서 한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야생화들을 들에 나가서 만나 보면, 너무나 그 꽃이 작아서 실망할 때가 많다. 이 또한 알고 보면, 외국의 큰 꽃들보다 우리나라의 작은 꽃이 더 진화한 모습이다. 사철이 온화한 기후에서 사는 꽃은, 악조건이 닥칠 때에는 그만큼 견딜 능력이 약하다. 4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에서 추운 겨울과 더운 여름을 참아내기 위하여 풀들은 이처럼 작은 꽃을 만들어 냈을 것이 분명하다.

 한 예로, 우리나라 들풀 중에서도 아주 작은 게 있다.  바로 ‘야고’(野菰)이다. 줄기가 있으나 아주 짧기 때문에 거의 지상으로는 그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며, 몇 개의 작은 적갈색 비늘조각을 내보일 뿐이다. 한라산 남쪽의 억새 숲의 틈에서 자라는 한해살이 기생식물이다.

 이렇듯 작은 식물들은 진화를 거듭해서 생겨난 소중한 목숨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