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쥬르, 나폴레옹

(103) 나폴레옹 전쟁이 시작되다

시조시인 2008. 12. 9. 07:05

(103)

  그 무렵에 이탈리아의 제노바에 머물러 있던 프랑스 군대가 오스트리아 군대에게 포위되어 곤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나폴레옹은 응천순인하여 한 번 더 이탈리아로 쳐들어가서 오스트리아 군대를 항복시키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응천순인’(應天順人)은 ‘하늘의 뜻에 따르고 국민의 뜻에 순종한다.’라는 말입니다. 이는, 막부득이한 일이었습니다. ‘막부득이’(莫不得已)는 ‘마지못하여, 어찌할 수 없이’를 이릅니다.

이 때부터 그 유명한 ‘나폴레옹 전쟁’이 시작되는 겁니다. ‘나폴레옹 전쟁’이란, 1799년에 나폴레옹이 집정 정부를 만들어서 프랑스를 다스리기 시작한 시기부터 1813년의 라이프치히 패전에 이르기까지의 유럽 여러 나라와 싸운 전쟁을 통틀어서 일컫습니다. 그 중요한 전쟁을 살펴보면, 1800년에 이탈리아와의 마렝고 싸움(Battle of Marengo), 1805년에 영국과의 트라팔가 싸움(Battle of Trafalgar)과 오스트리아와의 아우스터리츠 싸움(Battle of Austerlitz), 1806년에 프로이센과의 예나 전투(Battle of Jena), 그리고 1811년의 러시아 원정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 전쟁들의 목적은, 억눌려 있는 민중을 해방함으로써 프랑스 혁명이 낳은 사회개혁을 단행하는 데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나폴레옹은 전쟁이 좋아서 한 게 아니라 ‘억강부약’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치른 전쟁이란 뜻이지요. ‘억강부약’(抑强扶弱)은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붙잡아서 도와 줌’을 이릅니다.

나폴레옹은 머릿속에서 ‘번쩍’ 하고 아주 훌륭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곧 호위하고 있던 사관을 불렀습니다.

“이탈리아 지도를 가져다가 여기에 펴 놓아라.”

왜 나폴레옹은 갑자기 이탈리아 지도를 찾았던 걸까요? 아마도 중요한 계책이 떠올랐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지도’라고 하니, 불현듯이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냐고요? 그 사람은 우리나라의 방방곡곡을 누비며 지도를 만드는 일에 일생을 바친 ‘김정호’(金正浩)입니다.

그가 지도를 만든 목적은 2가지였다고 생각됩니다. 그 하나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여러 가지 작전을 세우기 위함이고, 또 하나는 각 지방의 특산물을 살핌으로써 모자라거나 남는 곡식과 물품을 서로 나누고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김정호에게는 둘도 없는 친구이자 동지인 최한기(崔漢綺)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실학에 뜻을 둔 사람이었는데, 그가 중국에 갔다가 많은 책을 구해 가지고 오게 되었습니다. ‘실학’(實學)이란, 17세기 후반부터 조선조 말까지 전통 유학의 관념적 태도를 극복하고 ‘실사구시’와 ‘이용후생’ 및 기술의 존중과 국민경제생활의 향상에 관하여 연구하던 학문입니다. 써 놓고 보니, 그 뜻이 상당히 어렵군요. 우선, ‘유학’(儒學)은 ‘공자의 사상을 근본으로 하고, 정치 도덕의 실천을 중심 과제로 하는 학문’이며, ‘관념적’(觀念的)은 ‘현실성이 없고 추상에 흐르는’의 뜻입니다. 또한 ‘실사구시’(實事求是)는 ‘사실에 근거하여 진리나 진상을 탐구하는 일’을 말하며, ‘이용후생’(利用厚生)은 ‘편리한 기구 등을 잘 이용하여 살림에 부족함이 없게 함’을 이릅니다.

그러한 최한기의 사상과 책들이 김정호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로 인하여, 김정호는 정확한 우리나라 지도를 만들어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그는 네 번이나 백두산을 올랐다고 합니다. 마침내 그는, 우리나라 땅을 샅샅이 걸어 다니며 실제로 거리를 일일이 재어서 지도를 만들었습니다. 그 지도의 이름이 바로, ‘대동여지도’입니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는, 우리나라 최초의 완벽한 지도입니다.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의 반도를 비롯하여 섬들을, 약 16만2천 분의 1로 줄여서 남북 22단으로 나눈 다음에 다시 각 단을 6치6푼의 폭으로 하여 옆으로 접도록 편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지도는, 인공위성으로 촬영하여 만든 오늘날의 지도와 비교하여도, 잘못된 부분을 찾기 힘들 정도로 정밀하다고 하는군요.

1861년에 김정호는 이 지도를 손수 그리고 나무에 새겨서 찍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 당시에 권력을 쥐고 있던 흥선 대원군에게 바쳤습니다. 그러나 흥선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실시한 장본인이라, 그 지도에 대한 생각이 좋을 리가 없었지요. ‘쇄국정책’(鎖國政策)이란, ‘외국과의 교통이나 무역을 막는 정책’입니다. 또한, ‘장본인’(張本人)은 ‘나쁜 일을 일으킨 주동자나 좋지 않은 단체의 우두머리 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김정호는 국가의 기밀을 누설한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갇혀서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김재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