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쥬르, 나폴레옹

(137)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시조시인 2009. 2. 4. 00:12

(137)

멀고 먼 옛날, 중국 남북조 시대에 ‘장승요’(張僧繇)라는 화가가 살았습니다. 언제인가, 그는 금릉에 있는 ‘안악사’(安樂寺)로부터 용의 벽화를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기에, 그는 엄숙한 마음으로 그 일에 임했습니다. 마음으로 먼저 그림을 그려서 용의 모습을 다듬은 다음에 붓을 들고 그려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꿈틀거리는 몸뚱이며, 거기에 번쩍거리는 비늘들이며, 힘차게 뻗어나간 꼬리며, 날카로운 발톱들이며, 그리고 불을 뿜을 듯한 머리며…. 두 마리 용의 그림이 어찌나 훌륭한지,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듯했습니다. 그러나 다만 한 군데, 눈동자만이 아직 그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 그림을 보고 놀라워하던 사람들은, 다소 의아해하면서 눈을 마저 그려 넣기를 바랐습니다. 그러자 장 화백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눈동자는 그려 넣을 수가 없다오. 그것을 마저 그려 넣으면 용이 하늘로 날아올라가 버립니다.”

사람들은 ‘그게 무슨 말이냐!’라고 하면서 빨리 그려 넣기를 재촉하였습니다. 장 화백은 하는 수 없이 먹물을 찍어서 쌍룡 중의 한 마리에 조심스럽게 눈동자를 그려 넣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번개가 ‘번쩍’ 하더니 천지를 흔드는 우레와 함께 용 한 마리가 하늘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벽에는, 아직 눈동자를 그려 넣지 않은 용 한 마리만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엘바 섬을 빠져 나와서 다시 권력을 잡은 지, 겨우 백일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리 참혹한 일을 당했습니다. 이를 가리켜서 후세의 사람들은 ‘백일천하’(百日天下)라고 일컫습니다. 그 백일 동안, 나폴레옹은 자유주의 제국을 내걸고, 농민 혁명 중에 얻은 영토의 확보를 약속하였습니다. 그로써 그는 ‘농민 황제’라는 새로운 칭호를 받았습니다. 나폴레옹이 그토록 농민에게 애정을 쏟은 이유는, 아무래도 코르시카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밑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나폴레옹은 연합군에게 졌습니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남대서양의 절해고도인 ‘세인트헬레나’ 섬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절해고도’(絶海孤島)는 ‘뭍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섬’을 말합니다.

‘세인트헬레나’(Saint Helena)는, 아프리카 대륙 서안으로부터 약 1천9백 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섬입니다. 아마(亞麻)가 많이 생산된다고 하며, 가공업으로 ‘레이스’(lace)가 특색을 지녔다고 합니다.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기 전까지 아시아 항로의 기항지(寄港地) 역할을 했다고도 합니다.

 이 곳은 기후가 좋지 않답니다. 일년 내내 무덥고 좀처럼 햇볕이 들지 않는 축축한 곳으로, ‘죽음의 섬’이라고 불리었다는군요. 그럴 테지요. 그런 섬에는 돌팔이 의사조차도 없었을 테니, 병이 걸리면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었겠지요. ‘돌팔이’는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면서 설익고 변변찮은 기술이나 학식, 또는 물건을 파는 사람’을 말합니다. ‘돌팔이’에 대한 말의 배경은 좀 복잡합니다. 먼저, ‘이리저리 다니면서 어설픈 기술을 판다.’는 뜻에서 ‘돌다.’와 ‘팔다’를 합하여 ‘돌팔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돌다.’에서는 ‘돌’이 나오고, 무당이 섬기는 ‘바리데기 공주’에서는 ‘바리’가 나와서 ‘돌바리’가 되었다가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돌팔이’로 변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돌바리’는 일명 ‘돌무당’(回巫)라고도 하는데, 그는 집집을 방문해서 치료를 겸한 간단한 기도를 하고 점을 쳐 주기도 했답니다. 그러는 중에 환자를 잘못 다루어서 큰 해를 끼치는 일도 종종 벌어지곤 했기 때문에, 이들을 나쁘게 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합니다.(김재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