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고시조 감상 419

繩墨업시 삼긴 바회/ 박 인 로

59. 繩墨업시 삼긴 바회/ 박 인 로 [원본] 繩墨업시 삼긴 바회 어내 規矩 알니마난 놉고도 고다니 貴하야 보니나다 애달다 可히 사람이 오니 돌마도 못하랴. [역본] 먹줄 없이 생긴 바위어찌 법도 알까마는 높고도 곧았으니 귀하게도 보이는군 애닲다 옳게 사람이면 이 돌만도 못하랴. [감상] 박인로(朴仁老 1561~ 1642)는 조선 중기의 가사문학의 대가이자 무인이다. 자(字)는 ‘덕옹’(德翁)이고 호(號)는 ‘노계’(蘆溪) 또는 ‘무하옹’(無何翁)이다. 39세 때에 무과에 급제하여 만호(萬戶)로 부임했고, 41세 때에는 친구 한음(漢陰) 이덕형을 찾아가서 감을 대접받고 이 시조, 즉 ‘조홍시가’(早紅柿歌)를 지었으며, 45세 때 통주사(統舟師)로 부임하여 무인다운 기개의 ‘선상탄’(船上嘆)을 지었다고 ..

슬프나 즐거오나/ 윤 선 도

58. 슬프나 즐거오나/ 윤 선 도 [원본] 슬프나 즐거오나 올타하나 외다하나 내 몸의 해올 일만 닫고 닫글 뿐이언뎡 그밧긔 녀나믄 일이야 분별할 줄 이시랴. [역본] 슬프나 즐거우나 옳다 하나 않다 하나 내 몸이 할 일만을 닦고 닦을 뿐이건만 그 밖에 남은 일이야 걱정할 게 아니다. [감상] 윤선도(尹善道 1587~ 1671)는 조선시대의 중기와 후기의 문신이자 작가 및 음악가이다. 본관은 해남(海南), 자(字)는 ‘약이’(約而)이고 호(號)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이라고 한다. 1613년 진사시에 급제하였고, 1628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며 1634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였다고 한다. 여러 관직을 거친 후, 보길도(甫吉島)에 은거하였고, 그 때 보길도를 배경..

大學山 님글 베혀/ 김 수 장

57. 大學山 님글 베혀/ 김 수 장 [원본] 大學山 님글 베혀 明德船을 무워내여 臣民江 거네 저어 至善所해 매야 두고 어줍어 삼강령팔조목을 낙가 볼까 하노라. [역본] 대학 산 벤 나무로 명덕 배를 만들고서 백성 강 건너게 해 지선 늪에 매어 두고 이제는 강령 조목을 낚아 볼까 한다네. [감상] 김수장(金壽長)은 조선 후기의 가인(歌人)이다. 1690년에 태어났고 죽은 해는 모른다. 자(字)는 ‘자평’(子平)이고 호(號)는 ‘십주’(十洲) 또는 ‘노가재’(老歌齎)라고 한다. 숙종 때 병조에서 서리(書吏)를 지냈다고도 한다. 김천택과 더불어 당대 시조 가단의 쌍벽이었다고 전한다. 이 작품은 사서 중 하나인 ‘대학’(大學)을 봐야 한다. 대학장구 경문을 보면 ‘대학지도 재명명덕 재친민 재지어지선’(大學之道..

大川바다 한가온대/ 김 춘 택

56. 大川바다 한가온대/ 김 춘 택 [원본] 大川바다 한가온대 뿌리업슨 남기나셔 가지난 열둘이요 닙흔 삼백예순이라 그남게 여름이 열리되 다만 둘이 열녓더라. [역본] 큰 바다 한가운데 뿌리 없는 나무 나서 가지는 열둘이고 돋은 잎은 삼백예순 나무에 열매 열리되 다만 둘이 있구나. [감상] 김춘택(金春澤 1670~ 1717)은 조선 중기의 문인이다. 본관은 광산(光山), 자(字)는 ‘백우’(伯雨)이고 호(號)는 ‘북헌’(北軒)이다. 김만중(金萬重)의 종손(從孫)으로 시와 글씨에 뛰어났다고 한다. 다섯 번이나 영해(寧海)로 유배되고 세 번이나 감옥에 갇혔으나 충효의 절개를 지켰다고 알려져 있다. 종조부 김만중의 소설인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한문으로 번역하였다고도 한다. 저서로 ‘북헌집’이 남아 있다..

大哉라 吾王苑囿/ 안민영

55. 大哉라 吾王苑囿/ 안민영 [원본] 大哉라 吾王苑囿 蒭蕘雉兎 하난구야 文王에 靈囿이러니 우리 聖上 慶武苑을 今古에 聖王之臺沿花囿는 한가진가 하노라. [역본] 크도다 우리 어원, 꿩과 토끼 기르누나 문왕에 영유라면 울 임금은 경무원을 예 지금 좋은 못 어원은 한가진가 여기네. [감상] 안민영(安玟英)은 조선 후기의 가객으로, 태어난 해는 1816년이라고 하는데, 이 세상을 떠난 해가 밝혀지지 않았다. 서얼 출신이다. 자(字)는 ‘성무’(聖武)이고 호(號)는 ‘주옹’(周翁) 또는 ‘구포동인’(口圃東人)이라고 한다. 성품이 고결하고 운치가 있으며 산수를 좋아하고 명리를 구하지 않았다는 평을 듣는다. 1876년 스승인 박효관(朴孝寬)과 함께 가곡원류(歌曲源流)를 편찬하여 시조문학을 제대로 정리했다. 이 시..

白岳山下 옛자리에/ 안 민 영

54. 白岳山下 옛자리에/ 안 민 영 [원본] 白岳山下 옛자리에 鳳闕을 營始하샤 經之營之 하오시니 庶民이 自來로다 아모리 勿亟하라사되 不日成之 하더라. [역본] 북악산 밑 옛자락에 경복궁을 중건하니 백성들이 절로 와서 공사 일에 참여했지 아무리 서둘지 말라, 며릴 안에 끝냈네. [감상] 안민영(安玟英)은 조선 후기의 가객으로, 태어난 해는 1816년이라고 하는데, 이 세상을 떠난 해가 밝혀지지 않았다. 서얼 출신이다. 자(字)는 ‘성무’(聖武)이고 호(號)는 ‘주옹’(周翁) 또는 ‘구포동인’(口圃東人)이라고 한다. 성품이 고결하고 운치가 있으며 산수를 좋아하고 명리를 구하지 않았다는 평을 듣는다. 1876년 스승인 박효관(朴孝寬)과 함께 가곡원류(歌曲源流)를 편찬하여 시조문학을 모두 잘 정리했다. 이 작..

白雲이 이러나니/ 윤 선 도

53. 白雲이 이러나니/ 윤 선 도 [원본] 白雲이 이러나니 나무끗치 흔덕인다 밀물에 西湖이오 혈믈의 東湖가쟈 아희야 白蘋紅蓼는 곳마다 景이로다. [역본] 흰구름 일어나니 나무 끝이 흔들린다 밀물에는 서호 가고 썰물에는 동호 가자 붉고 흰 ‘여뀌 마름 꽃’ 어디에나 곱구나. [감상] 윤선도(尹善道 1587~ 1671)는 조선시대의 중기와 후기의 문신이자 작가 및 음악가이다. 본관은 해남(海南), 자(字)는 ‘약이’(約而)이고 호(號)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이라고 한다. 1613년 진사시에 급제하였고, 1628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며 1634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였다고 한다. 여러 관직을 거친 후, 보길도(甫吉島)에 은거하였고, 그 때 보길도를 배경으로 ‘어부..

白雲은 簷下의 자고/ 작가 미상

52. 白雲은 簷下의 자고/ 작가 미상 [원본] 白雲은 簷下의 자고 倦鳥는 林中의 진다 數村鷄犬이 野人家의 風味로다 人間世를 다 니자시니 어늬 벗이 차자 오리. [역본] 흰구름은 처마 자고 지친 새는 숲속 잔다 시골에 닭과 개가 들사람 집 맛매로다 이 세상을 다 잊었으니 어느 벗이 찾아올까. [감상] 이 작품은 ‘청구영언 심민본’에 수록되어 있다. 말하자면 출전(出典)이 그렇다는 뜻이다. 스스로를 ‘야인’이라고 했으니 이 또한 선비임에는 틀림이 없다. ‘첨하’는 ‘처마 밑’을 가리킨다. 그리고 ‘권조’는 ‘지친 새’를 나타낸다. 초장을 본다. 흰구름은 처마에 잔다는 게 무슨 말인가? 실제로는 ‘처마 밑에 잔다.’라고 해야 하는데 소리걸음을 맞추기 위해서 말을 줄였다. 여기서 말하는 ‘흰구름’은 ‘하늘에 ..

무서리 술이되야/ 작자 미상

51. 무서리 술이되야/ 작자 미상 [원본] 무서리 술이되야 萬山을 다 勸하니 어제 푸른닙히 오날아참 다불거다 白髮도 검길줄알냥이면 우리님도 勸하리라. [역본] 늦서리가 술이 되어 온갖 산을 다 권하니 어제는 푸르던 산, 오늘 아침 다 붉구나 흰 털도 검게 할 거면 울 임께도 권하리라. [감상] 이 작품은 그 착상이 놀랍도록 신선하다. 아무래도 산골에서 밭이나 가며 사는 그냥 서민은 아닌 성싶다. 작품의 흐름으로 보아서 산골에 은거하여 사는 선비가 분명하다고 본다. 이 작품에서 ‘무서리’는 ‘늦가을에 처음 내리는 묽은 서리’를 나타내고 있다. 초장에서 늦서리가 내렸는데 산이라는 산에게 모두 권한다라고 했다. 왜 그럴까. 그 서리가 그냥 ‘서리’가 아니라 ‘술’이 되었기 때문이다. ‘술’이란 원래 혼자 마..

이바 이 집 사람아/ 정 철

50. 이바 이 집 사람아/ 정 철 [원본] 이바 이 집 사람아 이 세간 엇디살리 솟벼 다 따리고 죡박귀 다업괴야 하물며 기울 계 대니거든 누를 밋고 살리. [역본] 여봐요 이 사람아 살림 이래 어찌 살까 솥 따위 다 깨지고 쪽박마저 다 없구나 게다가 술 취해 사니 누굴 믿고 살겠나. [감상] 정철(鄭澈 1536~ 1593)은 조선 중기의 문인이며 문신이다. 본관은 연일(延日), 자(字)는 ‘계함’(季涵)이고 호(號)는 ‘송강’(松江)이다. 1561년에 진사시에 1등을 하고 이듬해에는 문과 별시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여러 관직을 지내고, 45세 때에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을 때 가사문학의 대가로서의 기질을 발휘했다고 한다. 그 후 55세 때는 좌의정에 올랐고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에 봉해졌다고 전..